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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진지하다

정신나간 제목 ; 알 파치노의 은밀한 관계

알 파치노 영화 마라톤을 아직도 하고 있다. 안 봤던 것도 보고 있고 봤던 걸 또 보면서 덕심을 폭발시키고 있지. 그리고, 이번에 새로 본 것 중에 '알 파치노의 은밀한 관계'라는 영화가 있다. 이건 뭐 보지 말라고 하는 제목 아니냐. 배급사가 안티여 뭐여. 이 할배가 올해 여든인데 아무리 알 파치노라도 70대 후반에 찍은, 무려 그레타 거윅이랑 놀아나는 영화라는 뉘앙스를 풀풀 풍기는 영화를 누가 보겠어. 심지어 그거에 혹해서 영화를 본다면 개쌍욕하면서 중간에 나올 것 같은디. 

 

여튼 이 영화의 원제는 험블링 The Humbling이다. 영화를 보고 나니, 겸손한 험블이 아니라 하찮은 험블이다. 원작 소설을 봐야 정확히 알게 되겠지만 ㅋㅋ 언듯 듣기로는 작가의 분위기나 태도가 별로 읽고 싶지가 않음.

 

주인공 사이먼 엑슬러는 60대 중반으로 평생 연극배우로 살아왔다. 연기를 좋아하고 잘하고 즐기고 재능도 있고 명성도 얻었고 그것만 하며 살았고 그것만 생각했고 그것만 할 줄 알았다. 그래서 친구도 없고 애인도 없고 마누라도 없고 애도 없고 마땅히 어울리는 동료도 없다. 그리고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관객은 떠나있고 평단에서도 관심을 주지 않고, 나이 때문인지 라이브공연 두세시간씩 할 체력은 안되고 기억력도 점점 안 좋아져서 평생해온 세익스피어 연극의 대사도 잊어먹을 판이다. 그러니 새 작품은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다 결국 본인 자신도 연기에 대한 욕망이 없어져 버렸다. 그걸 너무 늦게 깨달은 것이다. 그 다음은 뭐, 당연히 우울증에 호되게 후려맞는다.

 

영화는 엑슬러가 현실과 상상(망상?)을 구분하지 못하면서 시작한다. 상상도 본인이 원해서 하는 즐겁고 재밌는 상상이 아니고 이를테면, 잠깐 내가 관객이 앞에 있는 무대에서 같은 대사를 반복하고 있지 않나? 하는 것 같은 진짜 거지같은 종류의 혼동이다. 이런 혼동은 영화 내내 진행되는데 늙고 기력도 없고 사이먼이 명수형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하찮긴 하지만 치매로 풀어내진 않는다. 주인공은 계속 헷갈려하고 혼란스러워하고 연극대신 새로운 영감(삶)을 찾고 싶어하고, 찾았다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그게 페긴, 그레타 거윅 캐릭터다.

페긴은 레즈비언인데, 첫 사랑이라고 해야할지 어렸을 때부터 철이 들 때까지 열광했던 대상이 부모님의 동년배 친구, 완전 아저씨인 사이먼이었다. 페긴이 뭔가 핀트가 나간 캐릭터라는 건 확실하지만 그걸 자세히 보여주진 않는다. 다만 사이먼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확실히 사랑이 아니다. 뭔가 유년기의 판타지와 열정을 투영하는 건지 갈구하는 건지 해소하는 건지 하여간 그런 짓을 한다.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둘이 한없이 레즈비언 섹스에 가까운 섹스를 하고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사이먼이 자꾸 페긴에게 스테레오타입의 여성성을 부여하고 싶어하는 이유도 뭔가 있지 않겠나. 아, '남주의 여친'이라는 배역에 맞게 입히려는 의도도 있다. 사이먼은 보통의 삶을 살아본적이 없어서 인생의 모든 요소를 연극으로 보고 연극으로 표현하는 것 밖에 못한다. 쓰다보니 페긴은 해소가 맞는 것 같다. 사이먼은 페긴을 이용해서 평범한 삶을 경험하고 열정을 찾고자 하고 페긴은 사이먼을 이용해 현실에서 도피하고 감정을 해소하고 싶어한다. 두 사람이 같은 공간에 있는데 관계를 맺는 게 아니라 사실상 벽(상대방) 보고 혼자 노는 꼴 ㅋㅋ

 

이런 영화의 제목을 은밀한 관계라고 하면 안되지 않겠니. 자극적인 부분이 있는 건 맞지만 이건 60대 중반 노인네가 젊은 여자랑 은밀한 관계를 맺는 내용이 아니다. 물론 노인네가 젊은 여자랑 어떤 관계를 맺기는 하는데 정확히 무슨 관계인지 본인도 모르고, 은밀한 관계도 아니다. 보아하니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알고 있고도 남아서 온갖 미친연놈들이 자꾸 출몰하니까. ㅋㅋ

 

휴 그랜트가 웃기려다 실패하면 사실 슬픈 장면이라고 얼버무릴 수가 있으니까(혹은 그 반대라도) 코메디와 비극을 섞는 게 전략적으로 좋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갠적으로 휴 그랜트는 코메디는 코메디로 비극은 비극으로 정확히 표현하는 편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여튼 이 영화는 딱히 슬프지도 않고 딱히 웃기지도 않다. 아니, 정확히는 슬프기도 되게 슬프고 웃기기도 엄청 웃기거등. 근데 영화의 표현방식이 막 떠먹여주질 않아서 주의를 기울여서 봐야 하는데, 이런 늙은이의 종말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기도 하고 그렇게 무너지는 사람의 정신상태나 상황을 이해하는(혹은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거들랑. 아니, 오죽하면 배급사에서 제목을 은밀한 관계라고 지었겠냐고 ㅋㅋㅋ 대체 뭔 생각이여.

 

그럼 거지같은 제목에 비해 표현하고자 하는 게 있으니 한번 보라고 추천하기는 또 그르타. 왠지 노인네 나오는 영화는 (특히 그 노인이 외롭고 불행하게 죽어가는 이야기는) 아무리 작품이 좋아도 반응이 영 별루여. 그리고 이건 눈 여겨보고 해석해야 하는 영화라... 최근 이런 작품을 누구에게 추천해본적이 없는 듯? 보고 생각하기 귀찮잖아.

그리고 사실상 인디영화라 연출이랑 편집도 수수한 편이다. (수준급 배우가 줄줄이 나오는 20억짜리 인디영화;;) 편집기술이나 CG같은 것도 전혀 쓰지 않았는데 내가 이런 것도 좋아하거등. 크리스토퍼 놀란만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ㅎ 

연출이 연극적이면서도 영화적인데 연극배우를 영화로 풀어냈고, 배우도 연극배우이자 영화배우라 두 가지 다른 표현이 가능해서 욕심(?)을 부린 게 아닐까 싶음. 그 경계가 좋긴하다.

 

알 파치노 영화를 알 파치노를 기준으로 두 종류로 나누면, 감독이 알 파치노 연기에 빠져있는 경우가 있고 아닌 경우가 있다. 알 파치노 연기에 빠져있는 감독들은 연기의 디테일을 잡아내고 그걸 더 후벼판다. 그러다 과하게 가면 대갈치기만 졸라 하는 연출을 하... 그르지 좀 마라 진짜. 아닌 경우는, 갠적으론 배우가 캐릭터를 어떻게 해석했는지도 모르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캐릭터를 잡아내질 못한다. 감독이 배우보다 게으른 경우라고 할 수 있을 듯. 알 파치노 영화 중 망작이라고 하는 애들은 다 이 꽈다. 스토리가 구리면 연기라도 살려야 하는데 그것도 못하는 연출. 끔찍.

험블링은 전자다. 감독이 알 파치노 연기에 빠져서 사이먼의 몰락을 이런 저런 설명으로 풀어서 설명하지 않고 사이먼의 표정과 연극 대사와 독백으로 보여준다. 이걸 읽을 수 있으면 엄청 웃기고 엄청 슬픈 영화가 되고, 아니라면 '이런 영화는 왜 존재하는가'하는 생각을 들게 하겠지.

 

은퇴하고 집에서 할 일이 없어서 혼자 땅이나 죽도록 파다가 우울증 걸린 상태에서 보면 펑펑 울면서 볼 수도 있다. 물론 그래서 더 싫어할 수도 있음. 이런 내용은 이야기 할 가치는 있지만 이런 감정을 알기 전까지는 굳이 찾아서 볼 가치는 떨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근데 알 파치노는 왤케 비극을 좋아하는 거야? 코메디도 잘 하면서 웃기고 밝은 영화에도 출연하면 내가 남한테 추천하기도 좋잖아? 하긴 맹글혼은 해피엔딩이었지만 이것도 추천 못 했지. 해피엔딩으로 가는 여정이 겁나 험난해서. 그런 면에선 최근(?) 영화 중에는 대니 콜린스가 제일 나은가. 일종의 상실 혹은 쓸쓸함같은 게 깔려있긴 한데, 아네트 베닝도 나오는 훈훈한 가족영화임.

 

 

덧. 아이리쉬맨은 성공했다. 물론 '외롭게 후회하며 죽어가는 노인네' 부분은 마지막에 잠깐 나오고 말지만 ㅎ 아이리쉬맨은 디에이징프로그램에만 돈을 엄청 썼다고 한다. 그것 때문에 제작비를 조달하기도 힘들어서 몇년을 미루고 미뤄야 했다고. 그냥 40-50대 배우를 써서 나이들게 분장을 해도 됐을텐데 왜 굳이? 이런 생각이 드는데, 스콜세지랑+드니로+파치노의 조합이니까 다들 그냥 받아들이는 것 같다. 왜냐면 거꾸로는 못하거등. 늙은 버젼으로 드니로를 캐스팅해놓고 젊은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캐스팅 하는 건 못해. 오래 본 배우의 경우엔 젊었을 적 얼굴과 스타일을 이미 알고 있으니 다른 사람이 젊은 드니로, 젊은 파치노 연기를 해도 뭔가 좀 별로거등. 그냥 별로야. 그냥 마음에 안 든다고.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