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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진지하다

그 남자의 여자 feat 캐릭터 빌딩

히트(1995)는 남자 영화다. 총질을 해서가 아니라 서사가 남성중심이고 캐릭터도 주로 남자만 갖고 있기 때문이다. 주제도 남자들의 일, 의리 이런 류다. 주인공도 남자 두 명이고...

사실 이런 남자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를 주의깊게 보는 편은 아니다. 여자는 남자캐릭터를 보여주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기 때문에 캐릭터 자체가 없는 경우가 많다. 약간 스머프의 스머페트같은 존재? 남성성만 있는 스머프 세상에서 여성성을 갖고 있는 스머프는 캐릭터 자체가 여성이 된다. (그니까 스머페트는 여장남자일수도 있다는 거임. ㅋㅋ) 찌찌랑 보지만 있다면 성향이나 성격같은 캐릭터 따위 필요없음. 보통 남자 영화에서 여자는 그냥 남주랑 자는 여자일 뿐이고 나는 그런 거에 별 불만이 없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그딴 거 신경 안 쓰고 잘(재밌게) 본다.

 

근데 히트에는 캐릭터가 있는 여자 캐릭터가 둘이나 나온다. (뭔일이여, 마이클 만.) 비록 분량은 적지만 빈센트의 세번째 마누라인 저스틴(과 딸), 발 킬머의 마누라는 괜찮게 만들어진 캐릭터다. 그리고 닐의 여자는... 그냥 닐이랑 자는 여자다. 내 생각에 내가 닐에게 흥미를 못 느끼는 결정적인 이유가 닐의 여자 때문인 것 같다. 내가 빈센트를 좋아하는데 그 주요한 이유가 저스틴과 그 딸 때문이거등.

 

왜냐면, 내가 따로 떼서 만든 영화가 빈센트 서사였고 심지어 주인공이 저스틴의 딸이었다. 딸은 이 영화에서 딱 다섯씬 나온다. 1,2와 4,5는 사실상 이어지는 씬이므로 그냥 세 장면 나온다고 보면 된다. 다 합해도 2분도 안되는 것 같음. 이 영화는 2시간 50분짜리다.

 

1,2번씬에서 딸네미는 친아빠가 자기 보러 오는 것에 잔뜩 신나서, 아빠에게 잘 보이려고 옷인지 머리끈인지를 찾는다. 빈센트 아재랑 엄마 침실에 달려 올라가서 '엄마, 거시기 어딧는지 알아요?' 하는데 저스틴은 대충 식탁 위에 찾아보라고 대답하고, 빈센트랑 1분이라도 더 있고 싶어 딸네미를 옆에 두고 계속 빈센트에게 아침 같이 먹을까? 커피 내려줄까? 이딴 소리를 하고 있다. 딸이랑 제대로 된 대화를 하는 건 딸의 엄마가 아니라 빈센트다. 하이 스위티, 학교 안가니? 뭐 그런거. 그리고 빈센트는 1분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하는 세번째 마누라를 놓고 신나게 일하러 간다. 그리고 저스틴은 약을 먹는다. 

장면전환. 저스틴은 신문을 보며 내려오는데 딸네미는 아직도 그 놈의 머리띤지 옷을 찾고 있다. 어차피 안 올 친아빠라는 걸 알고 있어서 엄마는 딸네미의 사소한 간절함에 무심하고 결국 딸이 히스테리를 폭발시키고 난 다음에야 저스틴은 딸을 달래며 딸이 하는 말을 듣는다. 그리고 장면 끝.

 

나는 이 장면이 정말이지, 너무 좋더라고. 캐릭터는 이런 식으로 보여주는 거다.

저스틴은 그 뒤로도 나오는데, 전형적인 남자 없이는 못 사는 여자다. 남자가 자길 먹여살리거나 지켜주길 바래서가 아니고 그냥 남자가 옆에 있어야 심리적 안정을 느끼는 여자. (이게 이해가 안 가면 아들이랑 같이 있을 때 더 마음이 든든한 한국 엄마를 생각하면 된다. 일곱살 애새끼라도 아들이면 든든함을 느끼거등.)

저스틴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빈센트에게 인정받고 싶어한다. '나는 네가 경험하는 지저분하고 더러운 일을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계속 어필하고 요구한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빈센트는 개마초라 남자들의 일을 여자랑 공유하는 종자가 아녀. 빈센트의 형사과는 나름 다인종인데 여자는 없거등? 여자는 여자가 하는 일이 따로 있고 그 이전에 순수하고 순진한 존재로 보거등. 그리고 그 순수하고 순진한 (그래서 약간 불쌍한) 애가 저스틴의 딸이다. 애한테 말할 때는 목소리 톤도 바뀌고 표정도 훨씬 부드럽다. 연락도 없이 늦게 와서 걱정하던 저스틴에게 한다는 말이 그런데 애 아부지는 왔냐, 네 딸램은 괜찮냐 하는 거다. 나중에 닐이랑 커피숍에 앉아서 자기 인생에 대해 말할 때도 저스틴과 함께 딸을 거론한다. 빈센트가 이 두 여자를 좋아하고 아끼는 게 보인다. 하지만 두 여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을 주진 못한다. 

 

세번째 장면은 학교를 마친 딸이 부르니까 일하다 말고 애를 집에 데려다 주러 픽업하는 장면이다. 여기서도 빈센트는 딸의 상태를 물어본다. 비록 딸애의 대답에 마땅한 대꾸를 못하지만 빈센트의 표정은 딸에 대한 동정이 묻어나고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거라곤 이렇게 현실적인 문제(집에 태워다 주는 것)를 해결해주는 것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저스틴은 아무리 당겨도 끌려오지 않는 빈센트를 밀어서 관심을 끌어보려고 한다. 바람을 피는 거죠. 이쯤되면 '이 멍청한 여편네야'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이건 타인을 심리적으로 지배하고자 하는 짓이거등. 이런 에피소드는 이 여자가 남편한테 사랑받고 싶어서 정신이 나간 걸 보여주기도 하지만, 알맹이가 공격적이고 지배적인 성향이 있다는 것도 보여준다.

이런 부분이 내가 좋아하는 포인트다.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하는데, 각자의 성향과 원하는 게 너무 달라서 이 사랑의 최대의 역경이 자기 자신 혹은 사랑하는 사람인거다. 저스틴은 돈이 많기 때문에 그냥 말 잘 듣고 잘생긴 제비 하나 데리고 살아도 된다. 근데 굳이 개마초랑 사귀고 결혼한 거거등. (사뢍하니꽈.) 그리고 빈센트도 그냥 얌전하게 앉아서 남편만 기다리는 여자 만나면 됨. 근데 굳이 한 성깔하는 저스틴을 만나놓고는 이 여자가 얌전하게 기다리거나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이해해주지 않는 걸 좀 못 견뎌한다. 지가 잘 못한 걸 알아도 먼저 사과 못하고 달래주지도 못한다.

빈센트는 관심받고 싶어 엇나가는 마누라를 달래는 대신 즉흥적으로 닐을 만난다. 그리고 닐이랑은 멀쩡한 대화를 한다. 인생에 대해서, 일에 대해서, 자신의 성향과 철학을 말한다. 닐도 마찬가지다. 여친이랑은 안 하던 정상적인 대화를 형사님이랑 하고 자빠졌다, 진짜. 닐 얘기는 좀 더 이따가 하고.

 

딸이 나오는 마지막 장면은, 딸이 빈센트의 집(호텔)에서 자살시도를 해서 빈센트가 응급처치를 하고 병원으로 데려가는 장면이다. 그니까 딸이 나오기는 하는데 대사도 하나 없고 늘어져 있는 모습만 나온다. 여기서 빈센트는 꼭지가 돈다. 자기 팀원이 죽거나 다쳤을 때도 빈센트가 관심과 애정을 보이지만 자살한 딸래미를 봤을 때는 절박함을 보인다. 그리고 뭐, 능력있는 아재라 응급처치 잘 해서 병원으로 데려가고 그 와중에 침착하게 애 엄마 저스틴을 병원으로 부르기도 하고 여튼 잘 처리해서 애는 살린다.

병원에서 저스틴과의 부부관계는 끝장이 나지만 인간적인 유대관계는 계속 갈 거란 느낌을 받는다. 저스틴이 빈센트의 성격과 성향을 받아들임과 동시에(그리고 자기 자신의 성향도 깨닫고) 엄마처럼 행동하기 때문이다.

 

캐릭터는 혼자 만들어지지 않는다. 다른 인간과의 관계를 어떻게 형성하고 유지하는가로 보여지게 되는데 빈센트와 저스틴, 딸의 관계가 굉장히 유기적이고 설득력있게 그려져서 많은 씬이 없어도 흥미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딸래미는 불쌍해서인지 마음이 간다. 엄마는 남편에게 빠져있고, 아빠는 번번히 약속을 깨는 개쉐이고, 그나마 관심을 가져주는 엄마의 남편은 너무 바쁘고 너무 마초라 마음을 터놓는 대화같은 건 못할 것이다. 고립되어 있는 십대 캐릭터는 항상 좋다. 얘야말로 영화주인공이 될만한 캐릭터라고 할 수 있졉.

 

빈센트와 경찰 동료와의 관계도 굉장히 좋았다. 상하관계인데 일방적이지가 않다. 하다못해 빈센트의 정보원도 빈센트를 무서워하고 협조를 하지만 요래조래 놀려먹기도(혹은 밀당을 하기도) 하거든. 사생활이 있는 닐의 동료와는 다르게 빈센트의 동료는 사생활도 없고 딱히 캐릭터도 없다. 근데 빈센트와의 관계는 (빈센트 위주긴 하지만) 꽤 디테일하게 그려졌다고 생각한다. 빈센트는 자기가 가진 정보와 하는 생각을 항상 팀원에게 다 말해주고 어떤 순간엔 의견을 물어보기도 한다. 팀원도 반장님이 뭘 듣고 싶어하는지 척하면 척이라 눈길이나 손가락질만 봐도 뭘 말해줘야 하는지 알고, 내가 특히 좋아했던 건 빈센트가 뭘 하고 있으면 뒤에서 슬쩍 웃고 있는 팀원이었다. 그냥 영웅적이고 일 졸라 잘하는 반장님이 모든 걸 다 해먹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요. 빈센트는 팀원이나 다른 경찰이 실수해도 잡아먹지 않고 빈센트가 (마약을 하거나) 닐을 만나는 실수를 해도 팀원은 덤벼들지 않는다. 빈센트는 말투와 행동엔 리듬이 있다. 기본적으로 무겁지 않다. 뭔가 저 나름대로 멋을 부린다고 할 수도 있는데 캐릭터 자체가 속내를 잘 안 드러내지 않아서 그렇기도 하다. 그니까, 빈센트는 일만 잘할 뿐 그 외로는 좀 망가지고 위험하기도 한 캐릭터다. 그 유명한 은행 앞 총격씬에서 빈센트는 시민의 안전이 우선인 경찰이 아니라 어차피 이렇게 된 거 한 놈이라도 잡아 죽여야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는 개인이 된다. 그리고 실제로 한놈을 사살해버림.

 

반면, 닐은 슈퍼맨 스타일이다. 절대 남자라는 겁니다요. 행동에도 무게감이 있고, 쓸데없는 소리를 안해서 믿음이 가고, 쓸데없이 흥분하지도 않고, 술은 마시지만 취할 만큼은 안 마시고 (당연히 약도 안 하고), 절제된 라이프스타일을 갖고 있으며 단호한 결단력과 절대적인 카리스마로 동료들을 이끈다. (잡일은 혼자 다 하지만 동료들과 공유하진 않는다. 동료라기 보다는 부하임.) 그러면서도 으리가 있다. 그리고 그 자체로 완전해서 평생 외로움을 딱히 느껴본 적 없는 이 절대 남자가 사랑에 빠진다. 누구랑? 캐릭터가 없는 여자랑=ㅠ=;;;

 

물론 이 여자도 나름 상징하는 게 있다. 순수함이라던가 호기심이라든가 동정심을 유발하는 정서 같은 거... 그니까 남자다운 세계에 있는 여자다운 여자가 캐릭터다. 아무리 많이 봐도 30대 초중반의 여자가 자기가 일하는 서점에 자주 오는 (좋게봐도 40대 후반인) 남자한테 반해서 서점 밖에서 말을 건다. 내가 흥미롭다고 느낀 건, 닐이 주로 보는 책에 흥미를 느껴서 닐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게 아니라는 거다. 알고보니 책이 좋아서 서점에서 일하는 건 아니고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일하는데 생활비가 필요해서 서점에서 일하는 거였다. 그래서 뭐 백번 양보해서 그 남자의 취향은 전혀 알수는 없지만 여튼 뭔가 개멋진 서점 단골에게 아주 대차게 들이댈 뿐 아니라 만난 날 '나는 외로워요우, 넌 안 외로워?' 이딴 헛소리를 하고 자빠졌다. 뭐지, 이 여자 겁나 무서워. 물론 설정 자체가 아주 어려서, 아빠같은 남자에게 빠져드는 여자일 수도 있긴 한데 그건 좀 소름끼치니까 제외하자고. 무엇보다 그런 생각으로 들이대는 어린 여자에게 빠지는 닐이 소름끼치잖아.

 

여튼 첫날 호구조사하고 외로움 운운하더니 두번째 만났을 땐 닐이 여자에게 '나 이번일 끝나면 외국으로 갈건데 너도 갈래? 나 돈 많응께 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닐이 이딴 소리를 한데는 닐의 동료는 다 사랑하는 여자와 애새끼도 낳고 뭔가 행복한 가정을 꾸려놓으니까 나도 하나 가질래 하는 동기로 충동적으로 말하긴 한다. 그니까 이건 또 이해가 감. 근데 이 여자가 냉큼, 넹 갈께요. 하는 거다. 뭐냐고, 이 미친년은.

 

닐이 범죄자란 걸 뉴스 보고 알게 된 여자는, 뱉은 말 지키러 '같이 뜨기' 위해 돌아온 닐을 거부한다. 한 반나절 정도;;; 그러다 닐이 '난 너를 정말 사랑한다규. 네가 같이 가지 않는다면 나는 앞으로 외로움을 느끼게 되겠지.' 하니까 '오마이그릭갓' 이러면서 같이 나라를 뜨기로 결심한다. ..............?

하지만, 닐이 동료의 복수를 하겠다고 설치다가 빈센트에게 쫒기게 되자 닐은 여친 눈 앞에서 돌아서서 도망친다. 이 때 이 여자의 얼굴도 아주 예술이다. 약간 '헐' 혹은 'Aㅏ...' 요런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도망가는 남친을 보거등. 네 놈이 어떻게?!도 아니고 등신같은 결정을 한 것에 대한 후회도 없이 그냥 '엥? 진짜여? 진짜 그렇게 떠남?' 이런 표정으로 계속 남친의 뒷통수를 본다. 그게 끝임. 그게 이 캐릭터의 마지막 모습이다. 멍청한 년의 최후란...

 

그래서 다시보기를 해도 닐과 여친이 나오는 장면은 전부 패스한다. 왠지 내 쪽이 팔려서 볼 수가 없다규. 닐은 세상 멋있다. 스크립트 상으로. 범죄자라는 것만 빼면 거의 완벽한 인간인 거다. 닐의 정보원은 닐을 신뢰하고 좋아하고 선망한다. 함께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고문 정도는 당해야 닐을 배신하고 배신한 친구에게도 자비를 베푼다. 너무 완벽해서 재미가 없... 그리고 애초에 그렇게 완벽한 인간이 왜 저런 여자랑 사랑에 빠지는지도 잘 모르겠고(예뻐서겠지만), 사랑에 빠진 게 아니라면 굳이 위험을 감수하며 이 여자를 데리고 다니는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지. 꽤 현실적이고 냉철한 인간이라 분명히 괜한 짓이라는 걸 알았을텐데?

닐은 자기 여친이랑 있을 때보다 발 킬머 캐릭터의 마누라랑 대화할 때 더 캐릭터의 완성도가 높다. 그래서 상대역이 중요하다. 어떤 캐릭터가 매력있게 보이려면 주변 사람과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는지 보여줘야 하거등. 그런면에서 닐은 정말 취향에 안 맞았다=_=

 

 

덧.

뜬금없지만, 크리스토퍼 놀란 연출은 엄청 좋아하는데 놀란이 대본도 쓴 영화의 여성캐릭터는 하나같이 맛탱이가 가 있거나 캐릭터가 없다. 그래서 두 번은 안 보게 된다. 그러면 남자 캐릭터는 좋냐하면 그렇지도 않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