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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진지하다

틴무비를 빙자한 수다

1. 결국 노멀피플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2시간만에 1/3 이상을 읽었지만 더 안 읽기로 했다.

소설을 읽으려고 한 이유는 주인공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싶어서 였는데 소설은 너무 장황하게 주절대고 유치하드. 실제 보고 싶은 장면이 나오기 전에 멈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음. 이건 원작의 문제라기 보다는 배우들 피지컬 + 연출 스타일 때문에 내가 상상했던 것들이 너무 어른스러웠던 게 문제인 것 같다.

 

결론은, 원작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오긴 했는데 정서는 (배우의 연기력과 나의 상상력 덕분에) 드라마가 훨씬 풍부하게 표현됐다고 생각한다. 사건이나 대화의 배열을 바꾼(=정리한) 것도 마음에 든다.

 

 

2. 내가 영화 콜미바이유어네임을 못 봤다. 말그대로 못 봤다=볼 수가 없었다. 틀어놓고 도저히 볼 수가 없어서 막 뒤로 돌리다가 결국 꺼버렸다. (소설은 아미 해머가 녹음한 오디오북으로 들었다.)

 

콜미바이유어네임을 못 본 이유는 확실히 알고 있다.

포장이 너무 심하다. 이걸 첫사랑을 어쩌구 저쩌구 하면 곤란하다. 내가 보기에 내용 자체는 그냥 욕망의 첫(?) 해소에 관한 거였다. 욕망을 풀 편리하면서도 매력적인 상대가 그때 그 장소에 있었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멋지게 욕망을 구현한 것이죠. 근데 그걸 너무 과하게 포장을 해놨...

게다가 첫 욕망, 첫 경험은 아무리 포장을 해도 좀 구질구질하고 주접스럽고 삽질과 실패의 연속이 아닌가. 아닌가? 한방에 막 딱딱 맞아? 포르노처럼? ㅗㅜㅑ...

그나마 마음에 들었던=기억에 남는 건, 주인공 애가 미국 손님 빤스(?)를 훔치는 장면이었다. 내가 워낙 주접스럽게 추한 짓 하는 주인공을 좋아해서리. 근데 그게 다였던 모냥. 더 이상 기억이 안 난다.

 

마지막에 부모님도 멋지다고 하는데 그건 작위적이고 이상적인거지 멋진게 아니지 않나. 내가 멋진 부모님 캐릭터에 환장하는 앤데, 무슨 대단한 사랑을 했다고 그런 말을 해줌? 맥락에 안 맞는다. 아들네미가 자기 제자를 오~ 미국손님~ 이러면서 따먹는 얘기잖아=ㅠ= 미국손님도 오~ 이태뤼~ 이러면서 이태리 사람하고 잔거고. 카메라나 연출은 또 어찌나 밝고 반짝반짝했던지... 과해. 너무 과해. 감정과잉이여. 심지어 그 감정조차도 솔직하지 몬해.

 

참고로 (게이아들 혹은 그냥) 아버지으로 제일 멋진 캐릭터는 글리에서 커트 험멜의 아부지 버트다. 멋이란 건 그런 거지, 이상적인 소리를 맥락없이 흩뿌리는 사람이 아님.

 

 

3. 북미에서 나오는 하이틴무비나 드라마를 좋아한다. 하이틴의 욕망을 어른의 시선으로 귀엽고 1차원적으로 그린 하이틴무비 말고 '애새끼도 감정이 있고 욕망이 있고 고민이 있고 괴로워하고 즐거워도 하는, 그냥 아직 덜 큰 인간'으로 그린 하이틴무비를 좋아한다.

물론, 애새끼들 꼴값 떠는 것도 재밌다. 캬캬캬. 니들이 아무리 진상을 부려도 내가 십대 때 한 진상 짓에 비하면 귀여울 뿐이다 이거야. 더 하면 더 좋지 뭐. 나만 등신이 아니었구나 싶고. 그런 의미에서 지랄염병 17세 추천한다. 쥔공이 레알 진상인데 귀엽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하고 그렇다.

 

똑같은 진상짓을 해도 10대 애들이 용서가 되거나 불쌍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10대라서 그렇다. 아이들이 사는 세계는 지 딴엔 아무리 넓어봐야 그래도 좁다. 부모님, 학교, 주변 사람들이 전부이니 힘들어도 그 안에서 벗어나는 법도 모르고 그래도 된다는 것도 모르기 때문에. 안 됐고 애처롭잖아.

 

물론 항상 나이가 문제인 건 아니다. 원한다면 벗어나도 된다는 사실 자체도 알아야 하고, 그런 사실을 알아도 방법 자체가 주어지지 않으면 그냥 안에 갇혀 사는 사람이 많다. 사회가 그런 걸 용납하지 않을 수도 있고 당사자가 싸우는 것보단 안주하는 걸 선택할 수도 있다. 사회가 그런 걸 용납하지 않는다면 불쌍한 인간이 되고(그런 취급을 받고), 안주하거나 게으른 인간은 올드앤스튜핏이 된다. 올드앤스튜핏의 최악은 안주하거나 게으르길 선택한 건 본인인데 세상 탓을 하는 종자다. 이런 것들이 나이 먹으면 '라떼는 말이야~' 이딴 소리 한다. 끔찍.

 

'북미에서 나오는' 하이틴물을 좋아한다고 한 이유는 한국에서 나오는 건 이제 거의 보지 않기 때문이다. 애들이 죄다 어른의 꼭두각시이거나 시험귀신으로만 나오는데다 과하게(혹은 뻔하게) 못되거나 멋져 못 보겠다. 좀 찾아볼래도 예고편도 흉악스러움.

 

예전엔 하이틴 만화를 꽤 좋아했다. 그때는 순정이나 소년만화같은 장르물로 불렸지만 결국 중고딩이 보는 하이틴 물이었다. HERE는 갠적으론 좋은 하이틴 만화이라고 생각하지만 본 사람이 있을까 싶다. 너무 어두웠던 걸지도 모른다. 김진 만화는 한번 땅파고 들어가기 시작하면 진짜 어두워지는데, 난 그런 면이 좋았다. 슬램덩크랑 노다메칸타빌레도 하이틴물이고... 정말 좋은(잘 만들어진) 하이틴 물을 꼽으라면 다 만화가 아닐까. 정말 좋은 작품 많았다. 

확실히 요즘 작품은 기억이 안 나는구먼. 요즘 읽는 만화 중에 은수저가 거의 유일하게 고등학교가 배경이긴 한데 순전히 농업이랑 목축업을 다뤄서 읽는 거라 의미가 없다. 애초에 되게 작위적인 성장물이라 추천을 하기도 좀 그렇슴. 청소년 소설은 청소년을 둔 부모님을 타겟으로 만든다는 이야기를 한번 듣고 나니 읽을 맛이 싹 사라져 버렸고. 부모님이 골라준 청소년 소설 읽는 청소년도 솔직히 좀... 그르치 않으냐?

 

 

4. 노멀피플 인터뷰를 몇편 보면서 흥미로운 직업이 있다는 걸 알았다. 인티머시 코디네이터. 한국인이 알아듣기 쉽게 단어를 바꾸면, 섹스/베드신 코디네이터이다.

몇년 전만해도 무명배우이거나 여성배우는 섹스신에 대한 발원권이나 선택권이 별로 없었다. 50-60년 대엔 여배우에게 약을 그렇게 먹였다고 한다. 마약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던 분위기도 있겠지만(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감독인 아부지의 촬영장 따라다니면서 일찌감치 약을 접하게 된 것도 알려진 사실이다), 성폭행 씬을 리얼하게 촬영하기 위해 여배우에게 말을 안하고 실제로 성폭행을 해서 '리얼한 반응'을 촬영한 사건이 2000년대에도 있었다. 그러다가 2년 쯤 전에 이런 직업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인티머시 코디네이터가 하는 일이 뭐냐면, 섹스신이 있을 때 그걸 어떻게 표현하고 촬영할지, 어디까지 노출할지 등을 배우와 제작자, 감독 사이에서 조율을 한다. 감독이 제 딴에는 배우를 '배려'한다고 해도 결국 위계라는 게 존재하기 때문에 고용된 젊고 무명인 배우는 감독이 하자는 대로 따르게 되기 마련이니까. 중간에서 배우가 자기가 원하는 바 혹은 이 작품엔 이런 정도의 표현은 필요한 것에 동의하며 여기까지는 할 생각이 있는 식으로 말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최근 달라진 헐리우드의 섹스신 표현은 이것 때문인건가 싶기도 하다.

 

여튼 멋진 직업이다. 본인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약자의 편에서 멋진 베드신을 만드는데 일조할 수도 있잖여. 어차피 나올 장면인데 기왕이면 찝찝함 없이 연출되는 게 좋지 않겠어? 그런 의미에서 노멀 피플의 베드신이 더 좋아졌음. 주연 배우인 폴 마스칼은 자기의 첫 베드신을 촬영하는데 인티머시 코디네이터가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느꼈으며 앞으로도 그런 사람이 없으면 차라리 베드신을 안 찍겠다고 했는데 똑똑한 듯. 첫 베드신이 들어간 작품이 대박이 난 덕분에 앞으로 억지로 뭘 할 필요가 있을까도 싶지만;;

 

우리나라에도 이런 직업이 곧 생기길 바란다. 그럼 애정씬이 덜 징그럽게 표현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