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최근 몇 년동안 미쳐서 본 영상물이 세 개 있다.
빌어먹을 세상 따위, 토르 ; 라그나로크, 노멀 피플
그리고 좀 전에 깨달았는데 세 작품 다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캐릭터가 나온다.
빌어먹을 세상따위는 우울증과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꽤 디테일하게 다루고 사실상 '일련의 감정(혹은 무감각)'이 주제이자 소재라고 할 수 있다.
토르엔 알콜중독자(발키리), 양극성장애(헐크), 오이디푸스신드롬+대디이슈(로키)... 이후 엔드게임에서 토르는 외상후스트레스 장애+극렬한 우울증에 걸린다. 내가 이 세개 시리즈에 걸쳐 토르에 얼마나 미쳐있었는지=_=ㅋ
노멀 피플 여주는 자해+자학적 성향이 있고, 그나마 멀쩡해 보이던 남주는 중간에 우울증+공황장애를 겪는다. 거의 정신병에 두들겨 맞는다고 할 수 있져. 애초에 내재되어 있던 외로움+불안감이 어떤 사건으로 표출 된 거라 차라리 자연스러웠음.
우울증을 잘 다루는 작품은 꽤 많았다. 물론 한마리의 또라이로서 또라이들이 나와서 좋기도 하지만 셋 다 작품 자체가 유별나게 좋다. 세 작품 다 너무 좋은데 세 작품 다 전혀 다른 이유로 좋고 다른 방식으로 잘 만들어졌다. E.R, 웨스트윙과 함께 명예의 전당에 올려주지. 후훗. (덧붙여 이알의 우울증 환자 표현이야 말로 넥스트레벨이라고 할 수 있져.)
흠, 일이년에 한번씩 보는 영화가 꽤 되는데 이쪽도 전부 스타일이나 표현, 성향이 다 다르네?
2. 노멀피플 연출이 좋다. 어디서 더 좋다고 느끼냐면, 내가 지난 몇년 동안 정속으로 영상물을 본 적이 없다. 기본 1.2배속으로 돌리고 비어있는 장면은 바로바로 뒤로가기 누른다. 50분짜리 드라마를 20분도 안되서 보는 일도 흔하다. (이걸 과연 본다고 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만.)
근데 노멀피플은 처음에 1.2배속으로 돌려가면서 봤다가, 이 장면 괜찮았던 거 같아 하면서 다시 보니까 놓친게 너무 많아서 두번째 볼 땐 1.1배속, 그 다음엔 정속+뒤로가기 자체를 아예 안 누르고 그냥 보고 있다. 첨부터 제대로 봤다면 시간낭비 안 했을까? 싶기도 하지만, 어차피 골백번은 봤을 테니 상관없을 것 같기도...
여튼, 이걸 왜 정속+뒤로 넘기기 없이 볼 수 밖에 없냐면 그냥 보여주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세상따위에선 (특시 시즌 2에선) 두 주인공의 대사의 절반은 퍽하고 쉿이었지만 그래도 거긴 나래이션이 있었다. 좀 건너 뛰어도 놓치는 게 별로 없었다고.
근데 노멀피플에선 두 인물의 감정 불안감이나 초조함, 고립감 등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 뿐 아니라 이들이 어떤 식으로 세상과 분리되어 있는지, 둘이 같이 있을 때 얼마나 소속감과 안정감을 느끼는지를 대사로 다 표현하지 않고 대체로 카메라 연출로 보여준다. 두 사람이 대화를 할 때 이들이 정말 소통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전혀 접촉이 안되고 있는지까지도. 그러니까 굳이 김치로 싸대기 때리지 않아도 울고불며 싸우지 않아도 그 뒤의 감정을 보여주니까 상황이 안 좋을 땐 마음이 찢어질 것 같고 분위기 좋을 땐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이야기가 진행 될 수록 두 주인공의 관계가 무엇이든, 두 사람이 얼마나 멀리 존재하는가와 상관없이 거의 완벽한 소통을 하고 소속감과 안정감을 느낀다.
소올직히 좀 거추장스럽다고 느껴지기도 하는데, 왜냐면 요즘엔 이렇게 은근한 표현을 하질 않으니까. 그것도 12부작 드라마가... 물론 편당 25분이니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거기에 팬데믹 상황까지.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사람들이 진득하게 앉아서 이걸 보고 있었을 것 같지가 않아.
여튼 간만에 제대로 된 영상언어를 봤어요. 아이고 좋아라.
3. 남주가 몸이 좋고, 삼각근은 넘나 이쁜데 심한 거북목이라 신경쓰인다. 신경쓰여. 엄청 신경쓰여. 필라테스+요가 강사로서 신경쓰임. 등판 근육이 두껍게 잘 만들어졌는데 어떻게 저렇게까지 빠지지=_=? 그렇다고 골반이 튀어나오거나 하지도 않고 그냥 목만 나와있다. 승모가 좀 크긴 한데, 등이 굽어서 승모가 더 커 보이는 건지 그냥 승모만 큰 건지도 잘 모르겠음. 뒷판이 앞판보다 근육이 훨씬 큰데 딱히 앞판 근육이 위축되어 보이지도 않고... 특이허네.
삼각근은 좋아. 아주 좋아.
4. 노멀피플에선 남주 쪽이 예민보스다. 오만 것에 대해 오만가지 생각을 해서 결국 아무 결정도 못하고 확신도 못하고, 자기 감정도 잘 모르겠고, 그러면서 친구들과 사회에 속하고 싶어서 그냥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면서 넘어가거나 모르는 척하는 일도 많다. 그 친구들이 딱히 내가 원하는 종류의 친구가 아니더라도 그냥 익숙해서 원래 있던 거라 의문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게다가 그 빈약한 '안전지대'에서 벗어나니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른다.
여기에 더해 일종의 부끄럼? 샤이네스가 있는데, 이를테면 자신이 느끼는 몇 안되는 확실한 감정도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당연한 거 아냐' 이런 식으로만 설명한다. '내가 널 사랑하는 게 당연한 거 아냐.' 이런 것도 아니고, '그 애와의 우정과 나와의 우정이 다르냐'는 질문에 '당연히 다르지'하는 식이다. 그래서 후반부엔 '네가 여기 있길 바라는 건 당연하다'고 말하는 코넬에 마리안은 '너에게 당연한 게 뭔지 모르겠다'고 말하고 또 한바탕 삽질하고 울고 짜고 한 다음에야 코넬은 그 당연한 게 뭔지 설명한다.
그렇다고 그 이전에 코넬이 표현을 전혀 안 하냐하면 그건 아니고, 하긴 하는데 마리안이 엔간히 못 알아처먹기도 하거등. 코넬은 지 나름대로는 꽤 여러번 사랑한다고 고백을 하는데, 마리안은 '이 색히는 친절해서 나에게 이런 말을 해준다.' 혹은 '얘가 나를 계속 좋아하게 하려면 무슨 짓이라도 해야한다'라고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씩씩하게 파국으로 나아간다. 행동이나 생각하는 방식은 마리안이 훨씬 과격하고 거침없다. 스스로 하찮게 생각해서 더 거침없는 것 같기도 하지만. 새로운 환경에서, 자신을 모르는 사람 앞에선 다른 사람인양 행세하는 것도 잘한다. 좋은 의미는 아니고 애초에 관계 자체를 거부하는 마리안의 방법이다.
5. lots of emotions but don't show it emotionally.
빌어먹을 세상따위에선 두 주인공의 현실과 상황을 극단까지 끌고간다. 제임스와 알리샤가 현실이 외면하는 방식도 극단적이고 감정을 표현하거나 폭발시키는 방식도 극단적이다. 그런면이 웃기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감정이 과장되어 있진 않다. 나름의 방식으론 절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너무 극단적이라 웃긴데 너무 절제되어 있어서 마음이 찢어진다. 둘 앞의 현실과 환경이 암울해서 그런가?
노멀피플의 감정은 굉장히 현실적이고 사실적이다. 그리고 그 다양한 감정이 감정적이지는 않고 굉장히 만족스럽게 표현되었다. 찌질하지만 제대로 된 인간을 보는 만족감, 두 인물이 서로에게 느끼는 소속감, 존중, 애정에서 오는 만족감이 생긴다. (코넬이 마리안에게 진심으로 사과할 때, 마리안이 스카이프 너머로 코넬의 밤을 지켜줄 때 등.)
여튼 감정이 감정적으로 표현될 때 어지간히 잘하지 않으면 유치해지거나 싸구려가 된다.
토르 라그나로크를 보면 감정을 감정적으로 표현될 땐 코메디로 간다. '넌 완전 나쁜 친구야!' '너가 더 나쁜 친구야!' 할 때처럼. 그러다 정말 중요하고 필요할 때는 은근슬쩍 넘어간다. 그 감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만 잡아내도록 조심스럽게 배치하는 거임. 라그나로크에서 토르와 로키의 형제관계가 한층 발전하는데 그걸 이야기 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과 마찮가지다. 심지어 이 둘에게 제일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엘리베이터 씬 한글 번역은 좀 후지다. 레알 찐직역으로 해놨으...ㅠㅠ
6. 섹스란 무엇인가.
알리샤랑 제임스는 중딩처럼 보이고, 마리안이랑 코넬은 서른은 되어 보인다. 제임스랑 알리샤가 키스하거나 섹스할 땐 개가 사람을 핥는 것 같고(웃기면서 무감정하고), 코넬이랑 마리안의 섹스는 아름답고 생생하다. 과장되게 환상적으로 그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징그럽게 표현되지도 않고 그냥 생생하고 현실적인데 사랑스러움.
표현도 그렇지만 어떤 의미든 배우들도 양쪽 다 준성인(십대후반~이십대초반) 피지컬이 아니다. 물론 일부러 이렇게 캐스팅 했겠지만.
베드신이 이렇게 다른 이유 캐릭터와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에피소드가 되기 때문이다.
제임스랑 알리샤는 타인과의 거리 조절을 잘 못 할 뿐 아니라, 자신들의 감정도 아직 제대로 못 다룬다. 이들이 하는 키스나 섹스는 흉내내기이고, 인간들이 섹스를 하니 우리도 해보자는 센 척의 수단에 가깝다. 이 드라마에선 성적인 접촉이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사랑의 행위로 표현되지 않는다. 오히려 얘네들에겐 손을 잡는 행위와 포옹이 '내가 너를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제대로 손을 잡는데도 진짜 오래 걸린다.
코넬과 마리안의 섹스는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하는 애정의 표현이고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행위이다. 이들은 섹스할 때 가장 안정감과 안전함을 느낀다. 갠적으론 중고딩 성교육 자료로 활용해도 좋을 거라고 생각한다. 걔네들은 좀 제대로 하고 살아야하지 않겠음?
왜냐면, 일반적인 섹스씬 말인데, 갠적으론 한국 영화나 드라마에서 섹스신이 잘 만들어진 걸 본 적이 없다. 뭔가 한국인에게 섹스는 농담으로 은근슬쩍 넘기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사랑스럽게 표현하지도 못하는... 대체로 좀 징그럽게 표현된다. 뽀뽀하고 손 잡고 데이트할 땐 무지하게 삼삼하다가 옷만 벗으면 겁나 징그럽다. 연출이 징그러워. 일본도 징그러워. 하긴 일본은 옷도 안 벗었는데(섹스신도 아닌데) 징그러울 때가 있다. 그나마 포장해놓은 것도 이 지경인데 애들이 뭘 보고 배우겠음.
두 인간이 홀딱 벗고 물고 빨고 하는데는 intimacy가 기반이 되야 하는데 이건 천년의 사랑 이전에 '나는 아무런 무기가 없어도, 나를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나는 너를 안전하다고 느낀다'라는 감정(믿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게 마리안과 코넬이 갖고 있는 가장 기저의 감정이거등.
너는 구멍이 있고 나는 좆이 있으니까 한다가 아니라, 너가 나를 보호해 줄 것이므로 그 댓가로 해준다가 아니라고. 천년의 사랑은 많은 경우 '너가 나에게 성감염증을 옮겨도(혹은 내가 너에게 옮겨도) 나는 프로텍션(콘돔조차도) 없이 너랑 할거야.'이긴 한 듯. 구역질... 근데 성행위를 한다는 건 그런 리스크가 있다는 걸 인지, 인정한다는 뜻이다.
헐리우드는 아무래도 과장스럽게 표현을 하지만 최근엔 확실히 판도가 많이 바뀌긴 했다. 특별히 좋아하는 작품은 없지만 생생하기로는 원조인 섹스앤더시티의 섹스신은 재밌게 봤다. 특히 사만다랑 미란다의 베드신이 좋았다. 웃기기도 하고 감정이 덜 버무려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샬롯은 안습했고, 캐리는 너무 로맨틱해서 별로였다.
7. 토르 라그나로크를 보고 미쳐서 보고 보고 또 보다가 엔드게임까지 봤을 때는 살짝 미쳐서 토르에 대해서 끝없이 쓰다가 결국 지워버렸다. 정말... 끝없이 썼다.
너튭에서 한시간짜리 영화에세이를 틀어놓고 들을 때가 있는데, 참 대단하다 싶으면서도 오덕이라 무섭기도 하거든. 편집해서 한시간이면 도대체 몇시간을 떠들 수 있다는 거여. 근데 남 이야기가 아닌 거임. 난 이렇게 보고 쓰고 하다가는 심장마비로 죽을 것 같단 말이지. 게다가 왠지 다른 이야기까지 다 끌려나온다. 집중이 안 되나?
여튼, 마지막으로, 엔딩이 둘 다 굉장히 좋은데 갠적으론 빌어먹을 세상따위의 엔딩이 더 좋다. 제임스랑 알리샤는 마지막까지 성장 중인데 (성장도 삶도 끝이 없다.) 마리안이랑 코넬은 얘들 마이 성장했음 이러면서 끝난다. 물론 이것도 훈훈하고 만족감을 줘서 좋긴 했지만 갠적인 의미로도, 스토리나 연출적으로도 빌어먹을 세상이 좋음.
허리가 아파서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