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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메갈 이후의 여성주의

2000년대 이전의 엘리트(대학 내의 학자와 학생) 여성주의자들은 공부를 하고 그걸 정책적으로 실현하는데 집중했다. 그리고 나름 성과가 있었다. 정책적으로, 기관내 성평등지수가 나쁘지 않은 이유가 이거다. 문제는 문화적으로, 여성이 체험하기로는 여성의 지위가 그다지 오른 것 같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그리고 대기업이나 기관내에서 이뤄지는 성평등은 대부분의 여성에겐 해당사항이 없다. 단순노동을 하는 여성노동자의 처우는 그때도 나빴고 지금도 나쁘다. 하지만 엘리트 여성은 일생 경험할 일도 없고 경험하고 싶지도 않은 남의 문제일 뿐이다. 그런 여자들이 불쌍하긴 하지~하는 느낌적인 느낌이 있었다.

 

내가 아직 기억하고 있는 에피소드로, 2000년대 초인가 중반에 있던 호스트 관련 법안? 시행령이었다. 요는 호스티스는 되는데 호스트는 안 된다는 거였다. 여자들이 남자 끼고 노는 꼴은 도저히 볼 수가 없었던 아재들이 모여 굳이 통과시켰는데 그것도 웃기지만 여성단체의 소극적인 자세도 웃겼다. 당시 여성주의자들은 여자도 남자 끼고 놀게 해달라!!고 할 배짱은 없었고 그럼 니들도 끼고 놀지 말등가...하는 정도의 성명으로 끝났다. ㅋㅋ 지금 그런 시행령이 통과되면 반응이 어떨까?

 

메갈 이후는, 아마 이전 세대 여성주의자들도 나와 비슷하게 느낄 텐데, 조직화 되어 있지 않고 경계도 없다. 메르스 갤러리를 없애도 메갈리아 페북 페이지를 계속 신고하고 없애도 이 사람들은 없어지지 않을 거다. 구심점이 있는 체계적인 집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메갈 이후의 여성주의자들은 굳이 여성주의를 학문적으로 접근하지도 않고 지저분한 논쟁에 들어가면 같이 진창에서 구른다. 대학과 같은 특정 집단에 속해있지도 않고 굳이 엘리트가 되고 싶어하지도 않고 엘리트가 될 생각도 없다. 정책을 바꾸는 방법도 전과는 다르다. 예전 여성주의자였다면 n번방 같은 문제가 있다면 정책과 법을 바꾸려고 했을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꼬인 시각으로 보면, 정책과 법을 다루는 남자들과 전략적으로 협업을 했을 것이다.) 

지금은? n번방에 직접 들어간다. 기자도 아니고, 딱히 여성주의를 전공하지도 않고 여성단체에서 일하지도 않지만, 여성으로서 성범죄에 당면했을 때 정책이나 법 따윈 기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리고 '니들이 안 파면 내가 판다. 더러운 꼴도 봐야 한다면 내가 본다'는 식이다.

 

이건 이전 세대 여성주의자는 지금도 못하고 있는 거다. 성범죄 사건이 일어났을 때나 뒤틀린 성인지에 대해서 논문을 쓰던 기고를 하던 이전 세대 여성주의자는 걔들의 성인지가 '도대체 얼마나' 뒤틀렸는지 들여다보지 못하고 들여다보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뒤틀린 걸 알면 됐지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꼴인지 굳이 봐야해? 하는 식이었다.

국제적으론 아동성착취, 아동성매매에 대해 알리고 저지하는 운동단체가 있지만 국내엔 아예 없었다. 지금도 없다. 국내의 '보통 남자'들이 아동납치, 매매로 인해 만들어진 '흔하디 흔한 야동'을 봐도 그걸 공론화하는 언니들이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런 게 있고 보는 사람이 있는 건 알았으려나 몰라. 우리는 모여도 그런 얘길 아예 안 했다고=ㅠ=ㅋ

내가 영화제에서 일할 땐 아동성매매를 고발하는 외국 애니메이션도 있었는데 말이져. 한국에선 특정종류의 다큐멘터리가 아니면 성착취에 대해선 거론이 되질 않았다. 문제를 느끼더라도 '성' 문제를 거론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고 그런 분위기도 아니었다. 애초에 이런 건 성 문제가 아니라 인권 문제인데도 그랬다.

 

메갈 이후의 여성주의자는, 사회가 말을 해도 되는 분위기인지 아닌지 존나 관심없다. 문제는 문제고 니들이 보기 싫어도 나는 여론화 할 거다. 여론화하는 과정이 지저분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유아인이 여성주의자 되려면 오빠한테 허락받아 해도 욕만 뒤지게 하지, 진짜로 오빠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하거나 전전긍긍하진 않거든. 그러다가도 유아인이 동성애물 찐하게 하나 찍어주면 또 엄청 좋아할 걸? 그리고 그게 뭐 어때서? 왜 안 돼냐고 생각한다는 거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게 행동한다.

 

물론 메갈 이후의 여성주의자들이 헛발질을 거하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공부, 정리가 안 되어 있어서 다른 종류의 차별을 하기도 한다. 근데 이전의 여성주의자들도 성소수자를 차별하곤 했다. (난 그냥 인간은 차별을 안 하면 못 배기는 종자라고 차별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어느 쪽이나 자기 논리의 함정에 빠지는 것도 흔한 일이다.

 

나는 메갈 이후의 여성주의가 흥미롭다고 느낀다. 이들의 문화에 관심이 있고 동의하고 응원하는 부분도 있다. 나는 스스로를 여성주의자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소개도 하지만, 딱히 적극적으로 운동을 하진 않았다. (지금도 안 한다.) 책상머리 혹은 입만 터는 여성주의자인거다. 그리고 나같은 인간에게 자발적으로 공공시설 화장실에 '몰카는 범죄'라고 붙이는 것 같은 하찮아 보이지만 바닥에서 구르며 하는 활동과 그 활동을 하는 사람, 그런 활동으로 성과를 내는 이 현실이 고무적으로 보일 수 밖에 없다.

 

결국 세상은 욕 뒤지게 얻어먹으면서도 끝까지 행동하는 사람이 바꾸게 되어 있다. 나머지는 아닌척 거기에 발담그고 가는 거고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