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라인만 보고는 별 관심이 없어서 안 보다가 최근 글씨 연습을 할 게 있어서 일없이 틀어놨다가 글씨 연습은 관두고 정주행 했다. 이틀 만에 시즌 3 달리고 있음. 1 시즌 1, 2편 보고 되게 뒤늦게 '엥, 작정한 페미 드라마네' 했는데 알고 보니 원작이 있고 진짜 작정한 거이 맞네. ㅋㅋ 연출적으로 아니라고 느끼는 면도 많긴 하지만 대중매체에서 이 정도면 홈런이라고 생각한다.
준이 완전 평범한 여자인 게 좋다. 그냥 평범하게 똘똘하고 그냥 평범하게 착하고 평범하게 뻔뻔하고 평범한 멘탈에 투사도 아니고 투사가 되고 싶기도 하지만 아니기도 하고 싸우고 싶지만 싸우는 방법 잘 모르겠고. 일하는 것도 좋고 사랑하는 사람이랑 연애하고 사는 것도 좋고 애 낳고 키우는 것도 좋고, 좋은 엄마가 되고 싶지만 일도 하고 싶고. 이 뺑뺑이 알것냐. 준은 처음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그런 면에서 드라마는 준이 페미니스트가 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투사나 리더가 각성한다고 한방에 되는 게 아니듯 페미니스트도 한방에 되는 게 아니다. 어떤 페미니스트가 될지도 본인이 겪으며 정하는 거고. 처음 그런 쪽으로 눈을 뜨면 내적 갈등도 되게 심하고 흔히 말하는 꼴값을 하게 되는데 준이 그걸 또 다 해요. 이런 감정이 이게 대사로도 나온다. '부끄러움을 모르고 싶다. 뻔뻔해지고 싶다. 무지하면 좋겠다. 그럼 내가 얼마나 무지했는지 모를 테니까.' (시즌 2-4) 좋구만요. 갠적으론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계급마다 다르다는 걸 잘 보여줘서 좋았다. 어설프게 자매애 같은 거 들이대지 않아서 더욱 재밌게 보고 있음.
근데 내가 이야기 하고 싶은 건 닉이다. 닉은 준이랑 연애하는 겉보기에 운전사인데, 이 계급은 대략 길리아드에서 평민 계급이라고 할 수 있다. 드라마가 보여주는 건 주로 소수의 지배계급과 소수의 노예(핸드메이드, 마사 즉 장기 소모품), 이단자(단기 소모품)인데 닉은 흔치 않은 중간계급으로 나온다. 그니까 초반엔 직업 운전수이자 감시자인, 앞잡이라면 앞잡인데 별로 중요하지 않은 그래서 싫지도 않은 중간자로 보인다. 딱 재미없기 쉬운 캐릭터이고 스크린 타임도 굉장히 적고 대사도 거의 없고 표정 변화도 거의 없는 캐릭터인데 매력이 줄줄 흐른다. 준 이전에 있던 핸드메이드가 자살을 했을 때 보이는 태도나 준을 대하는 태도가 아주 좋고, 다른 캐릭터와의 거리도 잘 지키고 딱히 차별적인 태도나 말을 하진 않거든. 말을 가리긴 하지만 누구한테든 좀처럼 거짓말을 안 하니 사람이 신의가 있어 보인다.
닉은 근본적으로 준을 이해 못 한다. 여성으로서 혹은 엄마로서 준의 어떤 입장을 이해하는 건 오히려 계급이 다른 워터포드 부인이다. 멕시코에서 외교관이 왔을 때 지배계급의 입맛에 맞는 말을 해준 준이 뒤늦게 분노와 무력함을 느낄 때 닉은 '거기서 그럼 어떻게 해?'라며 애초에 그런 감정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렇다고 닉이 사이코패스인 것도 아니다. 준을 좋아하는 마음 때문일 수도 있지만 준이 대해지는 방식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연민을 보인다. 근데 그게 다임. 닉은 준을 구해주고 싶어 하지만 그건 준을 국외로 내보내는 거지 준과 함께 한나를 구하거나 체제에 맞서 싸우거나 하지는 않는다. 못한다. 할 필요도 없다. 닉은 준이 경험하는 걸 경험하지 못하고 준이 느끼는 걸 느끼지 못한다. 이해하지도 못한다. 준과 닉이 아무리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고 연민을 느끼더라도, 닉이 아무리 비밀스럽게 준을 도와줘도 닉은 근본적으로 준을 이해하지 못한다.
닉의 부인인 이든에게도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여자는 성폭행을 당해왔는데 닉은 본의 아니게 결혼한 아내랑 잠자리를 해야 하는 자신의 현실이과 입장이 '불공평'하다고 느낀다. 아내가 어린 나이에 생판 처음 보는 사람과 결혼을 해야하는 현실은 놀랍고 아내가 불쌍하긴 하지만 친절하게(성의 있게?) 대하진 못한다. 아내가 사랑에 빠진 건 이해하고 모른 척해주지만 사회적 용인을 받게 해주진 못하고 (애초에 그럴 능력도 없음) 뒤늦게 아내에게 해주겠다는 게 목숨을 부지하고 '겉보기에 평범한 가정'을 만들어주겠다는 거였다.
아아, 닉이여. 나는 네 놈이 정말 좋은데 정말 싫다.
그러다 시즌3에 보면 닉이 길리아드를 만든 군인이었다고 나온다. 운전수가 앞잡이로 감시역을 하는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건국의 최전방에서 싸운 군인이었던 것. 시즌 3에선 계급도 상승한다. (중간계급의 사람이 사고를 치면 가족을 싸잡아 골로 보내는데 와이프가 바람이 난 것에 대한 책임 없이 진급을 쭉쭉 잘도 함.) 평범하고 착한 사람, 그냥 체제를 유지하는 역할인 줄 알았던 인간이 결국 체제를 만든 인간이었다고 하는데 짜릿함을 느껴버렸다. 지금 딱 거기까지 보고 쓰는 거임 ㅋㅋ 이 제작자 연놈들, 너무 잘하잖아 >..<
그리고, 뭔가 닉과 준의 성적인 긴장감이 장난이 아님. 준이 워터포드 사령관에게 '일부러' 애교를 떨고 이쁜 옷도 입고 멋지게 입은 워터포드랑 외출도 가곤 하지만 그건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데 그냥 평범하게 생긴(?!) 데다 만날 핏도 잘 안 맞는 면옷만 입고 다니는 닉이랑은 손가락 끝만 스쳐도 야시시하고 그냥 서로 보면서 말없이 쪼개기만 하는데도 훈훈하다-ㅠ- 아, 훈훈해. 찐따 둘이 사귀는데 이뻐 죽겠네.
내가 이렇게 느낄 정도이니 당연히 커플 팬도 엄청 많은데 어떤 이성애자년들은 이런 페미 드라마를 보면서 준에게 닉은 넘나 아깝다, 닉이 준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때 같이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 준이 싫다, 준을 탈출시키지 못하는 닉의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준이 원망스럽다고 한다. 유튭 댓글이 아주 가관이다 ㅋㅋ 하긴 한국 리뷰를 볼까 했더니 초반 준을 보고 '꼴페미년 씨받이 돼서 강간당하는 걸 보니 속이 씨원하고 좋구만'하는 이성애자 놈들 때문에 피곤해서 관뒀다. 이런 애들끼리 모여서 살고 연애하고 결혼하면 좋겠는데 세상살이가 그게 안 된단 말이지.
덧.
결혼과 출산, 육아 이야기를 좋아하는지라 주말드라마(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딸?)를 열심히 보고 있는 쓸데없이 울 엄니에게 이 드라마 이야기를 해보았다.
나 ; 저출산으로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워져서 모든 사람을 억지로 결혼시키고 출산을 강요하는 전체주의 국가가 배경임.
엄마 ; 야, 너 거기 가서 살아라.
나 ; ......여튼 거기선 불임의 원인을 여성으로 보거든.
엄마 ; 그게 왜 여자 때문이야?
나 ; 당연히 여자 때문이지. 아들 못 낳아도 여자 때문이고, 자폐아도 여자 때문이고, 애가 기형으로 태어나도 엄마 때문이고 조산, 유산, 기타등등 몽땅 다 여자 때문이잖아.
엄마 ; ......
요즘 엄니는 미스터 선샤인을 다시 보기하고 있는데 난 도저히 여주와 남주의 나이 차이가 비주얼적으로 감당이 안 된다. 난 60대와 80대가 사귀는 건 아무렇지도 않지만 20대와 40대가 사귀는 건 이해 못한다. 숫자로만 보면 나이 차이야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지만 나이에 따른 사회적 지위와 문화적 배경을 생각하면 도저히 감당이;; 아니, 동등한 사회적 지위와 비슷한 문화적 배경을 갖고 있어도 안 되는 게 관계인데 그걸 뛰어넘겠다고? 뭘로, 생식기로만? 이러니 내가 열다섯 마누라에 식겁하는 닉이 안 좋을 수가 있겠음?
덧 2.
이 드라마에서 준과 닉의 섹스 이외에는 대부분이 강간이거나 조올라 소름 끼치는 미친 기독교식 (임신을 위한) 교배라서 두 사람이 더 야하게 보이는 걸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게 썩 마음에 들진 않는데 베드신 자체가 굉장히... 임신을 위한 행위와 똑같은 생식기의 합체로 시작해서 생식기의 합체로 끝난다고나 할까. 좀 다르게 하고 그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