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없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문제다. 나는 늘 돈이 없으니까. 나는 돈은 없고 시간은 많은 사람이다. 요즘은 더 시간이 넘친다. 밥을 잘 못 먹어서 밥 먹는 시간이 남는 것이다. 의외로 사람이 무언가를 먹으면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서 끼니를 줄이거나 간식을 줄이면 정신적인 상실감뿐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시간이 남아 무료해진다. 밥 먹는 걸 줄인 이유는 만들고 먹는 게 귀찮아져서라는 것이 첫째고, 둘째는 돈이 없어서다. 돈이 없는 이유는 돈을 안 벌고 쓰기만 해서 결국 돈이 바닥이 나서이고, 돈이 바닥이 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2011~2012 시즌 공연 중 열다섯 개를 한 번에 예매했기 때문이다. 한화로 약 130만원 정도. 석 달은 문제없이 살 수 있는 생활비를 썼으니 일을 해야 하는데 그냥 먹는 걸 줄이기로 했다. 먹는 시간까지 합해져서 그 전보다 더 시간이 남아도는 내가 하고 있다고 할만한 건 한 달에 한두 번 클래식 공연 가는 것이 다다. 여행 왔다고 사진을 찍으러 다니는 것도 아니고 관광지를 돌아다니지도 않는다. 그나마도 클래식을 좋아해서 그 공연을 예매한 건 아니다. 나에게 클래식이란 모차르트와 모차르트 아닌 것뿐이다. 유럽 오면 모차르트를 실컷 들을 줄 알았더니 웬걸, 모차르트 아닌 것만 듣게 됐다. 뭐, 아무렴 어때.
그리고 처음으로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에 다녀왔을 때 진짜 아무렴 어때가 되었다. 일단 내가 가본 공연장 중에서 음향이 최고로 좋았다. 빈 필하모니 공연 때도 좌석이 없어 5유로짜리 스탠딩공간에서 찌그러져서 들었는데도 음향이 좋다고 느껴서 신기하다고 생각했는데, 베를린 필하모니의 공연장은 정말이지 무시무시할 정도로 음향이 좋았다. 일단 악기 소리가 하나하나 다 들렸다. 정확히 하나하나 선명하게 다 들렸다. 음과 악기 소리가 하나하나 선명하게 다 따로따로 들리니까 뇌신경이 다 일어나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베를린 필 공연을 네 번 갔는데, 네 번 모두 다녀와서 밤에 잠을 잘 못 잤다. 너무 예민해져서 잠이 안 오는 것이다. 예민해지니까 소리가 더 잘 들리고, 잘 들리니까 얼마나 잘하는지 알겠고, 도대체 이렇게까지 잘할 필요가 있나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현악기의 1번부터 3번 주자의 연주는 정말 확연하게 따로따로 소리가 들리는데 그것도 신기하고, 악기의 음이 다 따로따로 구분이 되게 들리는 동시에 화음이 되어 귀에 들어오는 것도 신기했다. 지휘자는 모든 악기의 소리가 다 따로 들린다던데 그거 비슷한 걸 경험한 셈이었다. 그리고 열다섯 공연을 모두 다녀오면 나도 그거 가능 할 것 같았다. 근데 혹시 소리 듣기에 제일 좋은 자리가 지휘자 자리여서 다 들렸던 거 아냐?
그래서 베를린 필의 첫 공연은 음악 들으러 간 공연이 아니라 기예 보러 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거기다 첫 번째 공연의 두 번째 곡이 오보에 연주자의 현대음악 독주였다. 루치아노 베리오의 <Sequenza VII fuer Oboe>. 나는 이런 곡을 음악이라고 안 부르고 ‘이 악기의 음은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나고, 사람이 숨을 얼마나 길게 내쉴 수 있는지 보여주겠음!’ 하는 기예라고 부른다. 좋은 좌석에서 연주자의 숨소리까지 다 들리니 숨 참느라고 얼굴 빨개지는 것도 당연히 보인다. 오오, 빨개진다 빨개져. 더 빨개져. 계속 빨개져. 그러다가 숨을 한번 들이쉬면 마술처럼 얼굴이 다시 하얘진다. 이걸 스무 번 이상 반복하니 기예가 끝났다. 나는 열심히 박수를 쳤다. 수고했어요, 형아.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마음이었던 것 같다. 다들 박수를 열심히 쳤다. 곡이 좋아서든 기예가 좋아서든 오보에 형아가 고생을 해서든 어쨌든 감동을 주는 것이다. 평소라면 절대 돈 주고 듣지 않을 현대음악이지만 130만원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그래서 친구들이랑 낄낄대면서 말한다.
“20세기 초 예술가 같지 않냐? 굶으면서 공연 보러 다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