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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진지하다

타이카 와이티티를 좋아하는 이유

스아실 여자치고 나처럼 남성중심서사를 잘 즐기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게 영화든 만화든 애니든 야동이든 나는 거리낌없이 다 잘 본다. 스토리가 좋아도 보고 연출이 좋아도 보고 궁금증에 보고 하여간 다 본다. 잘 만들어 놓으면 뭐든 재밌게 본다. (난 캡아 캐릭터 자체를 굉장히 싫어하지만 윈터솔저나 시빌워 어벤저스 몽땅 다 재밌게 봄. 캡아가 연설하며 염병하고 리더랍시고 꼴값을 떨어도 그냥 재밌게 봄.)

요즘에 이런 걸 잘 안 보는 이유는 충분히 잘 만들어진, 내 취향의 작품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고해서, 여성중심서사라고 마냥 다 재밌게 보는 건 아니다. 뭐든지 보지만, 개떡같이 만들어놓은 여성중심서사를 보느니 차라리 잘 만들어진 남성중심서사를 보는 게 내 정신건강에는 더 이롭다. 하지만 이거 아니면 저거인 세상이 아니잖슴. 세상에 얼마나 많은 드라마와 영화 만화가 쏟아져나오는지 혼란할 지경 아니겠슴둥. 

 

그리고 나는 잘 만들어진 작품이나 잘 만들어진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한 테크닉을 단련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딱히 취향(혹은 사고방식)에 안 맞는다고 그걸 까내리거나 싫어하진 않는다.  작품이 너무 개똥같아서 작품과 작가가 등신같다고 생각할 때도 많지만, 그 등신같은 걸 만들기 위해 들인 정성과 시간과 에너지는 인정하는 바임. 

 

무언가를 만들고 완성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느정도 다 재능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작품이 아무리 개똥같아도 시작을 하고 끝을 내는 거 자체가 굉장한 거여. 많은 사람이 그걸 못하거등. 나도 (당연히?) 못하고.

하지만 세상엔 시작하고 끝내는 게 아무리 지난하고 힘들어도 아득바득 어지간히 마음에 드는 게 나을 때까지 하는 인간들이 있다. 나는 압도적인 노가다를 잘하는 사람을 특히 더 좋아한다. 어지간한 인간은 감히 법접할 수 없을 정도의 노가다를 감수하는 거. 그래서 내가 더 타이카 와이티티한테 특별히 더 빠져있는 걸 수도 있다. 

 

타이카 대본엔 인간에 대한 애정이 있고 따뜻함이 있다. 여성중심도 아니고 남성중심도 아니고 인간중심이다. 그 인간에 아이도 있고 어른도 있고 노인도 있고 나쁜놈도 있고 착한놈도 있고 멍청한 놈도 있다. 인종과 성별과 나이에 상관없이 사람을 굉장히 따뜻하게 보고 사람들의 상처나 상황을 굉장히 섬세하게 다룬다. 타이카 와이티티의 작품을 보고 상처받는 인간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공격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있다. 유색인종이나 LGBTQ+를 보기만 해도 공격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마초적인 남자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대표적.) 

근데 이게 타이카가 천재라서 혹은 그냥 타고 나서 그런 게 뚝딱 나오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인간이 시나리오와 편집에 쓰는 공이 가히 압도적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도저히 남이 따라할 수가 없는 시스템이여. 

 

그 시스템이 뭐냐하면 시간을 겁나 많이 투자한다는 것입니다=ㅠ=

 

일단 쓰는 방식은 엔딩 먼저, 그 다음이 오프닝, 그 다음엔 각종 시퀀스를 쓰고 그 다음에 이어붙이기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서랍에 넣고 2년에서 4년정도 푹푹 묵힌다. 

꺼내본 대본을 보고 "도대체 어떤 등신이 이딴 대본을 쓴거야"라고 욕하며 두세번 읽는다. 그리고 버린다. 

그리고 두세번 읽은 원본을 기억에만 의존해서 다시 쓴다. 이 과정에서 대본이 2/3 정도 줄어든다고 한다. 나머지 분량은 2~4년간 타이카카 성장한 만큼 새로운 걸 본 것 만큼의 수준으로 다시 채워넣는다. 

그런식으로 완성된 대본을 판다. 아직까진 완성된 대본이 아닌 줄거리를 요약한 시놉을 파는 일이 없는 모양이다. 

 

그리고 감독을 할 땐, 일단 대본을 바탕으로 찍되 가능한 많은 테이크를 찍는다. 배우에게 캐릭터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가능한 많은 걸 시도하라고 한다고 한다. 가능한 시간 내에 가능한 많은 영상을 만들어놓는다. 헐리우드는 촬영 기간이 짧다. 마블같은 대형 스튜디오는 2-3주 안에 영화를 다 찍는다. 대부분의 제작시간은 2-3주 안에 촬영을 하기 위해 준비하고 계획을 세우는 시간과 편집 및 CGI를 하는 시간으로 채워져 있다. 타이카 와이티티는 이 중에서 편집하는 시간이 특별히 더 길다.

 

타이카는 영화 편집에 최소 7개월을 투자한다고 했다. 토르도 길다고 했는데 내가 알기로 제일 긴 건 왓위두인쉐도우가 아닐까 싶다. 이 영화는 160시간을 찍었다고 했던가. 그리고 몇년에 걸쳐 이리 만들어보고 저리 만들어보고 한 겁니다. 이미 장편영화 서너편은 만든셈 아니냐고. 왓두위두인쉐도우는 대본도 하루에 한줄을 썼을 정도로 어지간히 오래 걸렸다고 했다. (쟈메인 클레멘트라는 뉴질랜드 아재랑 같이 했는데 진짜 둘다 대단함;; 실제로 이 영화 컨셉, 대사, 패러디, 캐릭터, 서사, 개그가 무시무시하게 어이 없을 정도로 잘 되어 있음. ) 

 

여기서 끝나냐면 그게 아니죠. 이정도로 끝나면 타이카가 아닙니다. 압도적인 노가다란 말그대로 시작부터 끝까지인 거임니다. 

타이카는 상영회를 가능한 많이 한다고 한다. 조조래빗은 열네번쯤 했다고 하고 왓두위두인쉐도우는 스무번을 넘게 했다고 한다. 여기서 관객을 최대한 디테일하게 관찰할 뿐 아니라 어디가 마음에 드는지 어디가 마음에 안드는지도 굉장히 디테일하게 물어본다고 한다. 내가 재밌다고 생각한 부분은, 같이 보면서 타이카가 '부끄럽다'고 느끼는 부분도 체크를 하는 것이다. 내 머릿속에서만 멋졌고 정작 만들어서 남에게 보여주니 창피하다고 느끼는 부분도 다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미친자식... 너무 좋아요 ;ㅁ; 

 

그리고 타이카에겐 이런 미친 짓을 할 수 있는 동력이 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좋아해줬으면 좋겠다. 다른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은 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해줬으면 좋겠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농사 아님 버스운전사 밖에 없다고 배우고 느끼는 뉴질랜드 마오리 촌동네 고향 애들에게, 북미든 호주든 어디에 살든 모든 원주민에게, 소외된 사람들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사람들에게, 다른 길이 있다고 보여주고 싶어한다. 내가 성공했으니 너도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널리 알려지고 잘 소비되는 백인 중년 남자의 이야기보다 우리는 소외되어 있었기 때문에 더 넓고 깊은 이야기를 갖고 있고 더 특별하게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 크고 넓게 보라고. 타이카의 엄마가 타이카가 예술가 되기를 부추기고 응원했던 것처럼 타이카는 다른 사람에게 예술가가 되라고 말한다. 

 

그만큼 타이카는 자신의 현실과 위치를 잘 알고 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미친듯이 일을 하는 걸 수도 있다. 기회가 언제까지 주워질지 모르니까. 그러면서 최대한 이 시스템에서 자기가 얻을 수 있는 걸 얻고 배울 수 있는 건 배우고 전할 수 있는 건 전하고 있는 것이다. 

 

난 정말로 이 인간의 작품과 솔직함과 창의력과 노오력을 좋아한다. 

 

 

 

덧. 

...타이카 와이티티 전문 블로그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음=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