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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거자들

고양이의 방광염

고양이를 한 마리 키운다. 막 세 살이 됐을 때쯤 만나서 지금 4년째 같이 살고 있다. 내 성격도 그렇고 고양이 성격도 그래서 둘이 막 좋아 죽는 사이는 아니다. 나름 애정표현을 하긴 하지만 좀 데면데면한 사이? 고양이도 나에게 요구하는 게 별로 없고 나도 고양이한테 별로 요구하는 게 없어서 그냥 각자 알아서 살았다. 그래도 딱히 아프거나 문제가 있었던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막 건강하게 살았던 거는 아니라 결국 방광염에 걸렸다. 처음 발견한 게 6개월쯤 전.

 

우리 집 고양이의 방광염 증세는 두 가지였다.

-화장실을 자주 가지만 쉬를 잘 보진 못하고 찔끔찔끔 싼다. (이 모습을 직접 볼 수 없다면 모래 상태를 보면 된다. 평소 덩어리로 2-4개가 있었는데, 어느 순간 덩어리 크기가 굉장히 작고 그 숫자가 많다. 이게 점점 심해지면 덩어리가 너무 작아서 부서지기도 쉽기 때문에 모래가 더러워지기만 하고 삽으로 뜨면 마땅히 건져 나오는 게 없다.)

-오줌에 피가 섞여 나온다.

 

다행히 방광이 붓거나 요도가 막혀 오줌이 가득 차있는데 못 나오는 상태는 아니었다. (요령이 있다면 방광을 압박해서 오줌을 짜낼 수도 있다. 해본적이 없거나 방법을 모른다면 쓸데없이 애 잡지 말고 아예 시도하지도 말 것.)

그렇다고 컨디션이 나빠지지도 않았다. 일단 병원에 데려가서 진단받고 처방받은 약을 (반은 성공 반은 실패하며) 먹이고 물을 좀 많이 먹으라고 물 그릇을 여기저기 두고 내버려뒀다. 사료를 바꾸고 갑자기 살이 찌면서 방광염에 걸린 거라 사료도 원래 먹이던 것으로 바꾸기도 했다. 약 빨은 먹힌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고 물은 많이 놔 봐야 처먹지를 않아서 증세가 좋아졌다 나빠졌다 했다. 대체로 좋은 기간이 더 길어서 그냥 물을 더 먹나 보다 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랑 살면서 한번도 화장실 실수를 안 하던 고양이가 여기저기 오줌을 싸고 다니기 시작했다. 이때는 오줌에 피가 섞여 있지 않아서 그냥 구박만 하고 지나쳤다. 그리고 한 일이주 지나고 나니 본격적으로 혈뇨를 보기 시작해서 (집 근처) 병원에 데꼬 가서 주사도 맞히고 약도 얻어와서 먹였는데 혈뇨는 없어졌는데 여기저기 오줌을 싸고 다니는 건 바뀌지 않음. 일주일 지나니 다시 혈뇨를 보기 시작하고 + 증세도 심해져서 다시 병원에 가서 같은 약을 더 타 왔는데 전혀 효과 없음. 약을 먹이는 과정에서 애가 스트레스를 받아 우울증 증세를 보임. 그래서 2차 항생제(더 쎈놈)으로 받아와서 먹이려는데 애가 경끼를 하며 거품을 물었다.

 

이쯤 되니 진심으로 EBS 고양이를 부탁해에라도 나가야 하나 고민이 들었다. 방광염이 심해지지도 않고 낫지도 않는 상태에서 고양이는 우울증에 걸리고 고양이가 여기저기 오줌을 싸고 다니니 나도 스트레스를 받아 과민성대장증후군에 걸려버렸다=_= 내 우울증이 도지기 직전.

 

그런 생각을 하고 보니 집이 딱히 고양이 친화적이지 않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화초에 밀려 창문에도 못 올라간지 오래됐고 스크래쳐도 좀 모자란 듯싶었다. 생각해보니 놀아준지도 너무 오래됐다. (낚싯대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내가 잘 못 놀아주는 건지, 고양이가 게으른 건지 흥미를 금방 잃어버린다.)

그래서 창문 주변을 다 치우고 창문 청소도 다 하고 거기에 좋아하는 간식을 올려서 유혹을 하고, 스크래쳐도 방마다 두고 평소 비비적대는 걸 좋아하는 책상다리, 창문 밑에 있는 선반에 로프를 둘렀다. 새로 타 온 약은 경끼를 일으키니 못 먹여서 그냥 맹물을 강제로 먹이기 시작했다. (하루에 100밀리.) 좋아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질색을 하진 않아서 일단 먹일 수는 있다. 그리고 물을 먹이고 나면 흥미를 보이든 말든 일단 무조건 놀아주거나 애정표현을 하거나 간식을 주고 있다.

 

환경을 바꾼지 4일, 맹물을 먹이기 시작한 지 이틀째.

일단 우울증이 조금 나았다. 아직 혈뇨를 보긴 하지만 피 색도 훨씬 연해졌다. 화장실을 자주 가긴 하지만 마시는 만큼 싸고 있다. 그리고 전에는 똥을 눌 때 빼고는 거의 화장실을 안 썼는데 이틀째인 지금은 오줌의 35프로는 화장실에서 본다. 아... 기쁘다. 애가 낫는 것보다 오줌을 좀 덜 치워도 된다는 사실이 기쁘다.

물론 고양이가 낫는 것도 좋다. 몇주동안 책상 밑 잡동사니 쌓아둔 곳에 들어가서 있었는데 지금은 이불 위에서 배 내놓고 누워서 자고 있다. 느무 이뻐-ㅠ-ㅋ

 

방광염 증세가 완전히 없어져도 1-2달은 더 강제급수를 할 생각이다. 난 초딩 때도 티눈을 뽑아 없애던 인간이다. 마음만 먹으면 고양이의 방광염 쯤이야. 훗. 고양이 장난감 만들다가 생각나서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