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면서 꼰대가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비슷한 경험이 반복되면 그게 마치 정답(혹은 진리)처럼 느껴지는데 그걸 '나는 정답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의 삶이란 거기서 거기인 경험이 반복되는 총합 같은 거다. 한 사람이 경험하는 영역은 그다지 넓지가 않아서 그렇게 내가 사는 좁은 세상에선 내가 제일 똑똑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나도 대략 '기획과 계획과 실행'으로 이어지는 일을 꽤 오래 했기 때문에 대충 그게 뭔지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잘한다는 건 아니고, 대충 어떻게 해야 기획과 계획과 실행이 되는지 그 구조를 알고 있고 그게 성공하거나 잘 되려면 최소한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내가 안다고 그걸 하느냐하면 그건 아니다. 지식을 갖고 있는 것과 행동을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영역이다. 그럼 그걸 어디다 쓰냐하면 전혀 안 쓰고 그냥 덕질하면서 '오, 이런 경우도', '오 저런 경우도' 하면서 어떤 패턴이나 방법 혹은 구조를 파악하는 걸 좋아할 뿐이다.
나는 한국이라는 나라는 예술가가 그럭저럭 살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동시에 예술가를 등신 만들기 좋은 구조라고도 생각한다.
지원금도 많고 지원금을 주는 데도 많아서 기획서만 좀 쓸 줄 알고 프리젠테이션만 잘하면 계속 정부 돈 받아 프로젝트하면서 리스크는 1도 경험하지 않고 근근히(?!) 먹고 살 수 있다. 내 돈 쏟아 부어 가면서 작품을 하다가 혹독한 비평을 받는 일도 없고 (정부 지자체 프로젝트의 평가란 작품을 완성했는가에 있지 작품의 완성도에 있지 않다.) 작품은 좋았지만 흥행에 망했다고 쩐주에게 욕먹거나 미디어에 욕 먹거나 하는 일이 없다. 미전은 얼마나 많고 단체는 또 얼마나 많은지 일단 부지런하고 끈질기게만 하면 거의 모두가 초대작가가 된다. 시를 읽는 사람보다 시인이 많고 미술관에 가는 사람보다 미술작가가 많은 판이여. (참고로 한국은 과학자도 겁나 많여.)
미술, 영상, 춤 등이 특히 이런 구조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문학하고 음악, 대중문화 쪽이 좀 힘든 편인데, 대중문화는 이미 잘 팔려서 지원금이 거의 없고 문학은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이 한정되어 있는데 반해 등단작가는 겁나 많아서 굳이 작가 양성을 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요즘은 글 좀 쓴다는 사람은 다 더 돈이 되고, 덜 꽉 막힌 시나리오, 만화 쪽으로 빠지고 있고 죽어도 문학이 더 좋다는 사람은 대체로 작가 말고도 직업이 하나 두개씩은 더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은 본업과 부업이 역전되어 버린다. 그래도 이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먹고 살겠다고 세상에 뛰어든 인간들임.
'본업과 부업이 역전되는 현상'은 프로젝트 지원금을 받으며 생계를 잇는 예술가에게도 똑같이 일어난다. 프로젝트를 하느라고 정작 본인 작업을 못하게 되는 것이다. 본인 작업을 하려고 프로젝트에 지원하고 지원금을 받은 경우도 어느 순간 작품이 아니라 프로젝트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린다. 문학 작가도 그랬고 애니메이터의 경우도 이런 경우가 많았다. 지원금 받는 프로젝트 혹은 상업 애니메이션 프로젝트에 돈벌려고 들어가서 일하느라고 정작 본인 작업은 못하는 경우. 밥 벌이라는 게 그렇지 뭐.
문제는 내가 생각하는 나와 사회가 생각하는 내가 다른 데서 생긴다. 본인은 예술가라고 생각하는데 자기 작품 안 만드는 예술가는 예술가가 아녀. 아무리 예술가란 '자기 스스로 예술가라고 우기는 사람'라고 해도 아닌 건 아니다. 곰브리치가 뭐라고 했든 현실은 그게 아니다.
이런 상황 = 꽉 막히고 좁은 바닥, 안 팔리는 예술, 이 바닥에서 허덕거리는 예술가를 그래도 어떻게든 먹여 살려 보겠다고 혹은 키워보겠다고 정부에서 계속 돈을 주다보니 좋은 작품은 안 나오고 이미 경력이 꽤 있는 사람도 마치 '예술가 지망생'처럼 구는 경우가 많다. 나이만 처먹고 여전히 애새끼라 '잘되는 인간은 천재적인 재능이 있어서 잘 되는 거고 나는 노오력은 하지만 여러가지 상황이 어려워서 잘 안 풀리고 있을 뿐이다'라고 정신승리는 겁나 잘한다. 그리고 돈 받으려고 했던 프로젝트도 자기 작품이라고 마치 죽은 아들 불알 잡고 있는 것처럼 굴기도 한다는 거지. 그렇게 10년 20년 지나서 제대로 된 사회생활도 못해보고 프로젝트만 줄창하면서 제대로 된 비평도 받아보지 못한 채로 그래도 나는 예술가여 하며 정신승리하다가 40대 중반 50대가 된다. 이성애자 여자는 그나마 결혼이라는 부차적인 선택지가 있다. 대단하진 않아도 예술가고 가끔 소소하게 용돈도 벌어오고 애도 키우니까 남편이 예술가 마누라입네 자랑도 할 수 있고 모냥 빠지게 구박도 안하거든. 이게 이성애자 여성의 어드밴테이지라고 볼 수도 있지만(그렇게 보는 사람이 많지만), 과연 그럴까?
덧붙여 나는 이성애자 남자 예술가가 돈 잘 버는 마누라 얻어서 작품은 안하고 놀고 먹으면서 사는 것도 꽤 봤음 ㅋㅋㅋ 그 중 하나가 진짜 인생이 산으로 가는 경우였지만 본인은 되게 만족하고 살드만. 진짜 세상에 또라이 ㅈㄴ 많당께.
여하간에.
기획자도 마찬가지다. 자기 기획없이 정부 지자체에서 받아서 하는 프로젝트에 익숙해지면 다른 길을 못 찾게 된다. 물론 우리나라 기업은 예술이나 문화행사에 후원을 징그럽게 안한다. 특히 돈 주는 건 엄청 싫어해서 대충 물품만 조금 대줘도 후원사로 이름 다 올려줘야 함. 근데 원래 돈이란 게 더럽고 치사한 거다. 아님, 내 돈 넣고 해야하는데 기획자는 돈도 없고 돈이 있어도 정작 내 돈이 되면 그렇게 막 후원해주지 못할 걸. 돈은 소중하거든. 정확히는 돈이 소중한 게 아니라 돈이 할 수 있는 게 소중한 거지만 아직 거기까지 못 갔으. 물론 소중함의 가치를 하는 작품을 만드는 게 힘들긴 하다. 근데 그렇게 깨지고 깨지고 깨지면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해야 겨우 좋은 게 나올까 말까 하거등.
그래서 윤종신같은 사람이 좋다. 이 사람이 음악(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방식을 좋아한다. 윤종신은 본업이 음악이고 부업이 코메디다. 그렇다고 코메디를 대충한다는 게 아니라 코메디를 하게 된 이유가 본업을 더 꾸준하게 잘하고 싶어서 한 경우(라고 한)다. 2000년대 초반에 윤종신과 같은 패거리에 있던 '예술적인 대중음악인'들이 윤종신을 꽤 타박했거든. 가오 떨어지게 왜 하필 코메디를 하냐고. 윤종신은 '코메디도 좋아하고 돈도 많이 벌고 그 돈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할 수 있어서' 코메디를 하는 거였다. 그 '예술적인 대중음악인' 중에 윤종신처럼 활발하게 음악활동한 사람 거의 없다.
윤종신 비슷한 케이스로 우리 결혼했어요 출연으로 결혼자금 모은 정인이 있쥐 ㅋㅋ
물론 이자람처럼 나는 곧 죽어도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해서 성공할 거야 했던 사람도 있다. 이 언니는 창작 판소리를 개척하셨음. 이 언니는 퍼폼도 잘하는데 곡도 잘 쓰고 연출도 잘하고 기획도 잘하고 하여간 다 잘해 ♡ 남이 알아주던 말던 꾸준히 열심히 계속 자기 음악을 내놓는 음악인도 많다. 힘들고 어려울 뿐 불가능하진 않다.
그리고 나도 나의 현실에도 윤종신과 이자람 같은 사람을 한 대여섯명 정도 알고 있다. 오만데 다 후비고 다니고 일을 하면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만나왔는데 40년 인생 탈탈 털어봐야 그런 인간 열 명을 못 채우는 것이다. 내가 이런 사람들하고 더 들러붙어 있었어야 했는데 내가 그런 인간이 아니니 들이대어 지지가 않더라고. 그래서 누구랑 놀았냐고? 정신승리하는 인간이나 나처럼 게으른 인간이랑 놀았다. 그리고 엇그제 이런 인간관계에 문득 회의와 의문이 들었다.
'본업과 부업이 뒤바뀐' 기획자와 예술가가 만나서 지원금 받느라 2020년을 다 쓰고 21년 지원금을 받으려고 기획서를 쓰는 걸 보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아, 이 사람들도 안 되겠구나. 그동안 내가 이 사람들에게 한 조언이랍시고 한 말은 자기들 속사정도 모르면서 함부로 짓거리는 말일 뿐이었다. 그것도 맞다. 내가 뭐라고 남에게 조언을 하며, 예술가는 모르겠지만 기획자는 다 알고 있거든. 내가 무슨 말 하는지 본인도 알고 있고 지난 몇년간 그런 주제로 대화도 많이 했다. 그 기획자가 이미 알고 있는 걸 내가 다시 말한다고 해서 바뀔 게 없다는 걸 이제 알 때도 되지 않았나? 피차 즐겁지도 않으니 시간낭비, 목소리 낭비, 정력낭비일 뿐이다. 하지만, 얼마나 대단한 속사정인지는 모르겠으나 자기들 속사정 따위 내가 알바도 아니고 대중이 알 바도 아니다. 내 속사정도 남이 알바가 아님. 글쟁이는 글로, 예술가는 작품으로, 기획자는 프로젝트로 말할 뿐이다.
결론 ; 나나 잘하려고요. 좀 더 내 일에 집중해야 쓰것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