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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진지하다

잘난 부모와 잘난 자식

예전에 어떤 교수가 자기 자식은 도대체 스스로 하는 게 없다고 투덜댄 적이 있다. 유럽 배낭여행 가는데 비행기표며 숙소까지 자기가 다 해준다는 걸 보니 전형적인 잔소리는 많이 하나 어쨌든 뭐든지 대신 해주는 부모였던 모냥. 여튼 그 교수가 '너는 네 스스로 여행도 많이 다니고 공부도 하고 그러지 않냐.'라고 하기에 '그렇죠, 하지만 저도 교수 아버지 있었으면 안 그랬을 거에요.' 했다.

그렇다고 내가 교수 아버지를 갖고 싶다는 건 아니다. 어렸을 땐 교수라는 직업이 가진 사회적 함의를 몰랐기 때문에 부러워하지 않았고 지금은 그냥 부모란 존재에 대해 별 생각이나 관심이 없다.

 

'어바웃 타임'을 보다가 마음이 찢어질 뻔 했던 '사고방식'이 있다.

주인공이 과거를 바꾸고 오니 자기 애가 바뀐 걸 보고 식겁하는 장면인데, 그 애가 뭐 열살 스무살 이렇게 나이가 있어서 둘 사이에 역사가 있는 것도 아닌 정말 한 돌 정도 된 똥싸는 기계가 바뀐 걸 보고 주인공이 바꾼 과거를 원래대로 만들고 돌아와 원래 자기 아이였던 똥싸개를 기쁘게 안아드는 것이 아닌가=_=?!

원래 똥싸개나 바뀐 똥싸개나 다 똑같은 자기 자식이었다. 다만 다른 건 한 애는 그 똥 싼 만큼의 시간을 갖이 보낸 거고 다른 애는 그 시간이 없는 새로운 애였던 거지. 주인공의 아버지도 폐암이라는 사실을 알고 과거를 바꿔보려고 했지만 자식들이 바뀌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에 그냥 폐암을 받아들이고 일찍 은퇴해서 애들이랑 말년을 즐겁게 보내는 쪽으로 노선을 잡았다.

 

딱히 다른 사람이 부모였음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부모가 바꼈다고 식겁했을 것 같진 않다.

근데 내 생각에 이런 사람이 나만 있는 건 아닌 것 같거덩. 내 부모도 내가 아니라 어디 말 잘 듣고 집안 일도 잘하고 동생 용돈도 주고 밥도 차려주고 돈도 잘 벌고 시집도 좀 가고 애도 낳는 여자가 딸이길 바란다. 하여간 다른 사람을 원하고 있음. ㅎ

 

근데 이게 내가 특이한 게 아니라 한국 사람 대부분이 그런 게 아닐까 싶다. 부모나 자식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긴 하는데 딱히 그 사람의 존재나 개성이나 특성을 좋아하거나 사랑하거나 받아들이는 것 같진 않다. 직업은 뭐 당연한 거고.

감정의 대상이 부모라 잘 와닿지 않는다면, 키우던 동물이 죽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느냐도 있을 것 같다. 가족영화보면 종종 나오는 장면이 아이가 키우던 동물이 죽었을 때 애가 뒤집어질까봐 부모가 비슷하게 생긴 동물을 갖다 놓지만 당연히 애는 자기가 키우던 동물이 아니라는 걸 알고 두배로 충격받고 부모의 부도덕함을 추궁하고 뭐 그러는...

난 한국 사람에게 과연 이런 감각이 있는가 하는 의문이 있다. 나도 나이가 들고 나서야 이런 감정을 처음 느끼게 됐다.

그럼에도 어바웃타임은 판타지이긴 하지.

 

엄마와 딸의 관계를 다룬 '레이디 버드'라는 영화에서 딸이 '엄마는 나를 안 좋아하지(like)?'하니까, 엄마가 '당연히 널 사랑하지.(love)'한다. 하지만 딸이 '그래, 하지만 날 좋아하지는 않지.'라고 못 박는다.

이런 걸 보면 여기나 거기나 부모와 자식이 느끼는 사랑은 감정이라기 보다는 팔자나 피할 수 없는 운명, 당위, 명제 같다는 느낌이 든다. 오히려 그 사이의 감정은 경의와 연민과 사랑과 미움이 복합된 복잡하고 전쟁같고 지긋지긋한 감정인 것 같기도 하고?

 

부모자식 간에 애정이라고는 먹고 죽을래도 없는 집구석에서 자라서 그런지 부모 직업이나 재산 정도는 그다지 다가오는 주제가 아니다. 가난뱅이는 여유가 없어서 자식을 사랑하지도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은 모양인데, 멀리서 보면 사회적인 현상으로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실제로 사회적인 문제이기도 하지. 하지만 그런 부모를 갖고 있는 입장에서는, 세상엔 돈이 있어야 자식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자식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돈이 없어서 연애도 못하겠고 결혼도 못하겠고 애도 못 낳겠다면 그건 그냥 니가 하기 싫은 게 아닐까 생각해볼만 하다. 물론 그런 사람이 많은 사회라면 이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하는 게 정부의 일이다. 하지만 내가 무언가를 하기 싫은게 정부 때문은 아니라는 거지. 그냥 내가 그런 인간이라 그런 것이다.

 

트레버 노아는 존재 자체가 불법인 시대에 태어나서 어렸을 땐 자신을 숨기며 살았고 가난할 때는 벌레를 잡아 먹을 정도로 징그럽게 가난했고 엄마한테 먼지 나게 얻어맞으며 자랐다. 트레버 노아의 엄마는 가난했고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도 아니라 트레버에게 아주 훌륭한 환경과 아주 좋은 교욱을 시켜주진 못했지만 자기 자식을 확실하게 사랑했고 트레버 노아도 엄마한테 사랑받고 보호받고 있다는 걸 느낀 모양이다. (그렇다고 갈등이 없었다는 건 아니다. 가난하지만 항상 웃음과 사랑과 애정이 넘치는 그런 소름끼치는 게 아니라 갈등이 생겨도 해소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집 안이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