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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없이 산다

별일 없이 산다 96

드라마 치즈인더트랩 다 봤당. 


일단 나는 드라마와 만화는 완전히 다른 표현양식을 가진 매체이고, 원작과 리메이크가 꼭 같은 이야기를 해야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제작자, 만드는 사람이 다른 사람인데 새로 만드는 사람의 철학이나 창의력에 들어가야 정상인 거지. 그러니 원작 운운하면서 리메이크를 비판하는 건, 원작팬의 마음은 이해하고 우리나라 리메이크는 대부분 원작을 따라가는 것을 더 긍정적으로 보는 걸 알고는 있으나, 애초에 글러먹은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원작은 원작, 리메이크는 리메이크. 


난 이 드라마를 보면서 같은 설정, 같은 플롯에 어떻게 스토리를 붙이느냐에 따라 작품이 얼마나 바뀌는가에 재미를 느끼면서 봤다. 사실 만화도 장르가 (엄청 평범한) 로맨스인데, 그냥 연출과 표현이 일반적으로 로맨스 장르에서 안 쓰는 것이었을 뿐이다. 플롯만 보면 굉장히 평범하다. 잘 생기고 키 크고 실력있는 재벌 상속자는 뭐, 제인 오스틴 때부터 나온 남주 설정이죠. 서민 출신 여주, 주인공에게 갈등과 고난을 선사하는 주변인, 조력자도 있고, 남주와 갈등관계에 있는 서브남주가 여주에 사랑에 빠진다거나, 남주 따라다니는 서브 여주, 이건 캐릭터 설정이라고 치면, 플롯은 '부자 남자와 서민 여자가 서로 편견에 의해 미워했다가 결국 서로를 알게되며 사랑에 빠짐'. 거의 모든 로코가 이 플롯을 갖고 있다. 

웹툰 원작이 '다르다'는 이야기를 듣는 이유는 기본 설정이랑 플롯을 약간 비틀거나 다른 작품에 없는 요소를 덧붙였기 때문이다. 잘 생기고 키 크고 실력있고 음침한 피해의식과 행동방식을 가진 재벌 상속자. 서민 출신이지만 노력을 하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닌 실질적인 실력파에 성격은 예민한 신경질쟁이. 주인공 포함 모든 캐릭터가 기본적으로 죄다 찌질이라는 것도 그렇고. 이 주변인 설정이 매우 현실적이다. 원작이 인간군상과 인간관계에 대한 표현을 아주 잘하고, 그것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 난 플롯도 재밌음. '부자 남자와 서민 여자가 서로 편견으로 싫어했는데, 지켜보니 서로 닮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고 이 닮음과 다름을 인정하며 관계를 맺어간다'. (여기에 소소하게 붙는 에피소드, 디테일이 스토리다. 플롯과 스토리 구분 못하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이렇게 구분한다.)

드라마가 욕을 먹는 이유는 기본플롯은 원작이랑 거의 똑같이 가져왔는데 스토리를 다르게 붙여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처음에 '원작에 충실한' 운운하기도 했고, 시청자도 보니 기본 플롯이 같고 거의 모든 에피소드를 그대로 갖다 썼으니 원작의 스토리를 미리 예상하고 덧씌워서 봤는데 보면 볼 수록 아니네? 스토리가 다르네? 이렇게 되는 거져. 에피소드 재배치나 분량은 그다지 큰 문제는 아니라고 봄. 박해진이 잘생겼고 화면에 나오면 즐겁지만 분량을 갖고 피디를 욕하기엔 좀 그렇고. 캐릭터 붕괴가 왔다는 것도 어디까지나 원작을 생각해서 그런거지 드라마가 캐릭터를 그렇게(소시오패스로) 만든 거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이 소시오패스인걸 제대로 설명했냐하면 거기에 대한 비판은 가능하겠지만... 여튼, 난 이런 차이점이 아주 재밌었던 케이스고 ㅋ 

드라마와 원작의 유정은 처음부터 다른 행동패턴을 보였다. 드라마에선 유정이 미니시리즈 주인공처럼 멋있게 나온다. 설이한테 뭔가 해주는 것도 그렇고. 만화에선 유정은 설이한테 크건 작건 물건 앵기고 유유히 떠나는 일은 없다. 뭘 해주든 조력자로 나설 때도 보통 옆에 붙어있음. 물론 유정을 진짜 소시오패스로 만들 줄은 미처 생각 못했다. 게다가 소시오패스가 자기가 소시오패스인 걸 자각하는 걸 다른 소시오패스를 보고 깨달음;;;; 마지막에 홍설에게 '솔직히 그동안 네가 힘들어 한거 이해 못 했다'라고 하면 그 전에 사과한 건 뭥...?

홍설의 경우에도 너무 착하다. 심하게 착하고 특유의 예민함이나 신경질도 몽땅 다 없어지고 그 대신 귀여움을 장착했다. 그냥 한국 드라마에 나오는 밑도 끝도 없이 착한 캐릭터를 홍설에 갖다 붙인 거지. 심지어 백인호가 그렇게 들이대는 데 그걸 못 알아채는 평범한 로코물 여주의 아둔함 역시 갖고 있다. 주변인도 마찬가지. 이게 너무 착한인간과 나쁜인간을 나눠서 그려버리니까 이야기가 굉장히 단순해졌다. 거기에 유정이 소시오패스라고 하는 것도 이상하다보니 납득이 안 되고, 유정이 나쁜 인간에게 하는 행동에 대해 '그게 뭐?' 이렇게 되는 거.

남주연도 원작에선 애가 악하다기 보다는 학교 내 여자 중에선 지가 제일 잘나고 쿨하고 공부잘하고 싶었던 앤데, 인간이 쿨하지 못해서 홍설보다 공부 못하는 게 싫고 유정이 자기에게 선 긋는 것도 싫고 그래서 삐뚤어지게 굴다가 완젼 헛발질해서 나가떨어지는 경우에 가깝다. 드라마에선 남주연이 그냥 나쁜년처럼 나오니까 유정이 남주연 얼굴을 만지는 또라이 짓을 하게 만든다. 김상철이 유정한테 일장연설을 하는 것도, 유정보다 김상철이 하도 또라이처럼 구니까 설득이 안됨 ㅋㅋ 나름 김상철을 현실적인 찌질함을 부여하려고는 한 것 같은데 그건 제대로 표현이 안 된 듯. 시골출신 나름 수재가 노력했지만 도시 수재를 못 따라가? 이건 뭔 개소리여... 내 생각엔 오영곤이 진짜 짜증나게 잘 만든 것 같고, 백인하가 좀 입체적인가? 싶은 느낌적인 느낌이 있었다. 배우가 귀엽게 잘 표현한 것 같기도 하고 ㅋㅋ 

여튼 원작에서는 암유발자라고 불리는 캐릭터가 악인이라 그런 행동을 하는 게 아니라 캐릭터의 성격과 행동양식 주변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런 행동양식이 나온다. 이런 애들에 대해 홍설은 왜 그러는지 알만한 부분이 있어서 자기한테 떼어내면서도 신경이 쓰이는 거고, 유정은 알만한 부분이 있든 없든 인간이 정도를 지켜야 하는데 왜 그걸 지키지 않는지 궁금하지도 않고 알고 싶지도 않다는 쪽임. 그러니까 원작에선 모든 캐릭터가 찌질할 뿐 (몇몇은 진짜 암을 유발할 정도로 찌질한 게 맞지만 ㅋㅋ) 나쁘거나 착한 게 아니다. 근데 드라마에선 일단 캐릭터를 단순한 히어로 혹은 빌런으로 만들어놓으니 인간관계를 그리는데 깊이와 수준이 떨어지는 건 당연한 게 아닙니꽈. 


이건 그냥 드라마 수준이 떨어지는 거니까 딱히 그렇게 욕을 먹을 필요는 없는 것 같기도 하다. 뭐, 이 또한 지나가리라.

나는 드라마를 처음에 볼 때는 오만과 편견으로 만들려고 하나하는 생각을 했다. 유정이 처음에 너무 멋있게 나와서, '다 오해였어! 미스터 다아시처럼 알고보니 착한 사람이야!' 이럴 줄 알았는데 아니었음. 예상을 빗나갔으니 잘 만든건가? ㅋㅋ 화면도 이쁘고 배우도 엄청 신경써서 이쁘게 잘 찍긴 했더만. 

아, 나한테만 제일 거슬렸던 것이 백인호 피아노 관련 에피소드였다. 원작에서도 무려 대학교수가 무려 한때 유망한 클래식 피아니스트 지망생이었던 애한테 하농을 치게 하는 것도 좀 심하다 싶었는데(백인호가 전자피아노로 피아노 연습하는 것도 ㅋㅋ;;;) 그걸 고대로 드라마에 들고 옴;;; 차라리 인벤션, 신포니아, 평균율을 치라고!! 배우가 피아노를 직접 치면서 현장 녹음을 어떻게 했는지 피아노 녹음이 너무 구리고 조율 제대로 안 되어 있는 거 좀 짜증이었고, 피아노를 못 치는 것도 좀 거슬렸지만 그건 뭐 됐다고 쳐도 마지막회에서 콩쿨에 사용하는 피아노도 좀;;; 3미터짜리 공연용까진 예상 안했지만, 웬 동네 피아노학원에 넣는 소형 그랜드 피아노가 뙇! 백인호 캐릭터의 피아노 설정을 디테일하게 그릴 거였으면 그 분야에 대해 제발 공부 좀 하라고. 


디테일 망한게 한두개가 아니지만... 피곤하니 일단 자야겠다. 생체리듬을 정상으로 돌리려고 하면 일이 터지거나 우울해지거나 필리버스터를 하네=ㅠ=;;; 어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