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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없이 산다

여기만 아니면 돼 1

여행을 하는 데는 딱 두 가지만 있으면 된다. 시간하고 돈. 둘 중에 하나가 압도적으로 많은 건 괜찮은데, 둘 중 하나라도 없으면 여행이 안된다. 시간이 아무리 많아도 돈이 한푼도 없으면 여행이 안되고 (옆 동네여행은 가능), 돈이 아무리 많이도 시간이 없으면 여행이 안 된다. 한시간이든 두시간이든 시간을 내야하고, 몇 천원이라도 돈은 필요하다. 

근데 많은 사람들이 둘 다 엄청 많아야 여행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거든. 둘 다 없으면 여행을 못 함의 반대는 둘 다 많아야 여행이 가능함이 아니다. 내 생각엔 둘 중 하나만 많아도 풍요로운 여행이 가능하다. 내 경우엔 시간이 많은 경우에 더 풍요롭다. 시간이 없어서 하는 패키지 여행... 며칠도 아니고, 당일치기 여행 한번 했다가 죽는 줄 알았다. 농담이 아님. 기억에 남는 게 없다는 건 둘째치고, 당시에 차 타고 이동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그 뒤로 가족 여행으로도 패키지를 한 번 갔는데... 난 가족 여행도 싫고 패키지도 싫은 인간이어서 진짜 헬이었음. 여행이 아니라 지옥을 다녀왔다 ㄷㄷㄷ 


여튼, 보통 시간과 돈 중, 둘 중에 어떤 것을 선호하느냐에 따라 여행스타일도 나뉜다. 물론 돈도 많이, 시간도 많이 투자하는 여행을 좋아하고 그럴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건 보통 사람에겐 별로 해당사항이 없는 경우 아닌가? 그리고 이 사람들은 남의 여행기나 여행 정보도 필요없다. 돈이랑 시간이 많은데 무슨 정보가 필요하냐=ㅠ= 그냥 돈 왕창 들고 어디든 가서 돈 쓰면서 돌아다니면 된다. 참고로 정보는 돈과 교환 가능하고, 시간 투자가 요망됨. 돈 없이 여행 다니려면 정보가 많이 필요한데, 정보를 긁어모으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죠. 간단...


나 같은 경우는 시간을 많이 투자하고 (뉴질랜드 1년, 호주 3개월, 캐나다 10개월, 유럽 15개월, 네팔 2개월, 태국 보름, 대만 2개월) 돈을 잘 안 쓰는 편이다. 총액으로 봤을 때 제일 많이 쓴 곳이 (당연히) 유럽이다. 근데 유럽에서 15개월 거주하면서 (비행기 표 등 모든 경비 포함) 천만원을 안 썼다. 이게 나도 아이러니한 게 내가 유럽에서 일을 안 했다. 그리고 빈에서 3개월, 베를린을 거점으로 스위스 3주, 아이슬란드, 폴란드, 체코 2주 여행하고, 독일 지방도 두어군데 다니며 베를린 필 공연을 필두고 베를린 오페라, 체코필, 체코 오페라, 빈필, 빈오페라... 공연도 꽤 다니고 나름 독일어도 배워보겠답시고 학교도 다녔는데 한국 와보니까 한 800 정도도 안 쓴 것 같더라고. 어쨌든 놀거 다 놀았는데 통장에 돈이 남아있어서 근가보다하고 계산 안 해 봤음.

그래도 어디에 돈을 쓰고, 어떻게 아꼈는지 생각해보면... 일단 숙소비가 거의 안 들었다. 장기 여행이면 방 렌트를 하는데, 나는 엄청 싸게 빌렸고(집은 깨끗하기만 하면 됨)+친구가 여행 간 사이 친구 집을 봐주며 빌붙고, 여행 다닐 땐 카우치서핑 이용. 여기에 나는 소비 기준이 꽤 명확한 편이라 평소 생활비도 많이 쓰지 않는 편이다. 쇼핑의 기준은 원하는 게 아니라 필요한 것으로 한정되어 있음. 필요하면 사고, 필요하지 않으면 안 삼. 그럼 생활필수품도 아닌데 문화 활동비가 왜 이렇게 많이 나가냐면, 음악이나 책이나 기타 등등은 나에게 필요한 지출임. 생존을 위한 투자라고 할 수 있다. 별로 내가 문화적인 인간이라 그런 게 아님. 

독일은 일을 구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싸들고 간 돈을 쓴 경우고, 뉴질랜드와 호주, 캐나다에선 최저 생활비만 벌면서 생활을 했다. 일년씩 가는 장기 여행은 워홀로 간 거였다. 보통 워홀로 가서 여행, 알바, 어학을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이 세가지를 할 수 있다는 거지 세가지 모두를 다 잘 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일년만에 어학 마스터 택도 없고요, 알바로 돈을 벌어봐야 물론 한국에서 알바하는 것보다야 몇배는 많이 벌 수 있지만 그렇게 벌려면 다른 짓을 못하고, 여행은 일년 다니면 꽤 다니긴 하네... 여튼 나 경우엔 한국을 떠나는 게 목적이었기 때문에 가서 뭘 할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래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돈은 조금 벌고, 돈 벌려니 말을 할 줄 알아야 해서 말을 배운 것 뿐이다. 여행은 베낭 싸들고 다니는 여행을 안 좋아해서 잘 안 다녔음. 그러니 돈을 많이 벌지도 않고 쓰지도 않게 됨. 비행기표와 초기정착비를 가져가서 두 어달 이내에 알바를 구해서 일을 해다가 처음에 들고 간 비행기표+초기 정착비를 다시 벌어오는 게 보통 패턴. 내 경우엔 이게 항상 200만원 정도였던 것 같다. 그러니까 여행을 가기 전이나 후나 통장 잔액엔 변함이 없음. 한국에 있으나 외국에 있으나 하는 짓은 비슷 = 일은 적게, 노는 걸 많이. 논다고 해봐야 동네 공원이나 도서관이나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모두 공짜) 그냥 빈둥댈 뿐이다. 내가 빈둥대도 아무로 뭐라고 하지 않는 곳에서 마음 껏 ㅋㅋ 내가 나가서 하는 짓을 보면 내가 여행을 하고 있다고 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 하긴 일상도 여행이란 사람이 있지. 

 

나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경우 여행의 목적에 따라 돈이 많이 드냐, 시간이 많이 드냐가 나뉘기도 한다. 휴향을 원하는 사람이 돈을 안 쓰면서 여행하긴 힘들고, 아프리카 종단을 하고 싶은 인간이 시간이 없으면 안되지. 거긴 일단 가는데만 이틀씩 걸리니까. 내 경우는 일단 여기서 벗어나는 게 목적이었기 때문에 단기 여행은 별 의미가 없었다. 최대한 오래 나가 있어야 했지. 뉴질랜드에서 한국으로 귀국할 때는, 처음에는 다시 금방 나올 생각이었고 귀국 한달 전이 되니 '아, 나오는 게 맘대로 되는 게 아니겠구나'하며 현실을 자각, 그 때부터 잠을 못 잠. 귀국하고 나서는 한국이 너무 시끄러워서 계속 잠을 못 잠. 내 얼굴이 가장 노란색이면서 가장 까맷을 때였다. 애가 상태가 엄청 안 좋았지. 그래서 6개월만에 호주 출국. 그러나! 뉴질랜드에서 자연환경하고 사회에 관심이 생겨서 사이버대학의 관련학과에 입학을 하고 갔는데 호주의 인터넷망은 시망. 전화선 쓰는데도 많았기 때문에 수업 자체를 들을 수 없었다. 결국 중간고사 기간에 맞춰서 입국 테크를 타며 한동안(사이버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다시 나가지 못했다. 대신 요 기간에는 한국에서 열심히 지방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귀농에도 관심이 있어서. 여튼 이 기간에 일도 하고, 공부도 하고, 친구도 만나고, 돈 빌려주고 떼어먹히고, 폭행사건의 피해자가 되기도 하고, 녹색이니 평화니 맘대로 나불대는 인간들한테 학을 떼기도 하고 그랬지=_= 아, 옛날이여... 

이런 걸 보면 일상도 여행이란 말이 맞긴 맞는 듯 ㅋㅋㅋ 나도 참 나름 버라이어티했단 말이야=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