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슈얼리티는 사람마다 다르다고 한다. 인간의 정체성이나 사고방식이 다 제각각이듯 성에 대한 접근법이나 성적 정체성이나 지향성도 제각각이다. 이상적으로는 그렇다.
인간은 사회 안에서 태어나고 교육받으며 성장하고 여기서 벗어나는 사람은 사실상 없다. 여행이나 유학, 이민 등을 통해 이 문화권에서 저 문화권으로 옮겨가거나 경험하는 일은 있어도 결국 어떻게든 사회 속에서 다른 인간과 관계하고 영향을 받으며 살 수밖에 없다. 제 아무리 독립적인 인간이라도 여기서 벗어날 방법은 거의 없다.
그러니 정체성은 대체로 사회 내에서 형성이 된다고 봐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른바 타고나는 성격(혹은 성질)이 아무리 제각각이라고 해도 그걸 표현할 때는 그 사람이 몸 담고 있는 사회문화적 언어로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현실이 너무 자연스럽고 편리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깊게 생각을 안 한다.
나로 태어나서 나로 자라고 내가 내 몸뚱이 안에서 살고 있으므로 당연히 나와 내 몸을 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근데 실은 그게 말처럼 단순하지 않다는 걸 굳이 말을 안할 뿐이지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다른 환경에서 전혀 몰랐던 성격이 튀어나오기도 하고 어떤 종류의 어려움을 겪으면 자기 인간성과 인내심의 바닥을 직면하게 될 수도 있다.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외면하거나 거부하기도 하고 정신승리하기도 한다.
여성주의를 처음 접한 여성이 처음 몇년은 분노에 가득 차서 벌벌 떨게 되는데 그 이유 중에 하나가 자기 자신과 자기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던 사회를 전혀 다른 눈으로 보게 되기 때문이다. 최소한 부모님한테는 똑같이 사랑을 받고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닐 때, 사회에 대한 기여도가 이미 존재하고 거기에 따라 시민을 구분하고 차별하는 걸 알아챘을 때, 내가 피해자였던 것만큼 가해자였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자기 자신과 세상이 고깝게 보일 수밖에 없다. 사고방식이 변하면서 섭섭함과 야속함을 뛰어넘는 분노가 동시에 날뛰는데 이럴 때 진짜 힘들다.
그리고 이런 걸 경험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 그 계층을 특권층이라고 한다. 나는 딱히 여성에 비해 더 사랑받고 더 우대받고 산 것 같지 않은데?라고들 말하지만 여기서 특권이란 그렇게 눈에 확연히 보이는 게 아니다. (차별도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다.) 20대 중후반에 혹은 더 늦게, 심하면 40-50대에 '아들이 아니니까 당연히 사랑 못 받고 살았고 거기에 대해 섭섭함은 있었지만 그래도 의문을 품지 않고 살았는데 그게 실은 옳지도 않았고 정신 차려보니 나도 내 자식을 차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책을 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겪는 내적 갈등을 '전혀 생각도 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privilege를 갖고 있다. 내가 남보다 눈에 띄게 더 많이 돈이 많고 더 많이 누려서가 아니라 타고난 성별이나 성격, 특질 때문에 정체성이나 사고방식이 뒤흔들리는 일을 경험할 필요가 없다는 것 자체가 사회적 우위에 서 있다는 뜻이다.
어쩌다 보니 중장년층 아줌마들이랑 만나는 일이 많은데 '여자는 생리를 하니까 당연히 빈혈이 있고 폐경(완경) 이후로 빈혈이 없어진다'고 하는 아줌마들이 정말 많다. 그 연배의 여성 중 열에 아홉은 다 그런 경험을 하고 그러니 그들의 현실에선 그게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여성의 빈혈은 굉장히 경제적인 질병이다. 잘 살고 성적으로 평등한 나라일수록 여성의 빈혈 발병률이 낮다. 나를 예로 들면, 나는 생리를 시작하기 전부터 심각한 철 결핍성 빈혈이었다. 이미 열 살에 수혈을 받든가 아니면 철분제를 끼고 살든가라는 말을 들었고 그렇게 25년을 더 살다가 식단을 완전히 바꿨더니 빈혈이 나았다. 지금은 거의 완치 상태이다. (참고로 철 결핍성 빈혈의 원인은 내출혈 아니면 섭생 문제임. 내 경우엔 섭생이 문제였던 것이다.) 내 부모는 눈에 띄게 아들-딸 차별을 하는 사람이었지만 대놓고 '딸이니까 고기를 먹지 마'라고 말한 적은 없다. 하지만 여자는 날씬한 게 예의이므로 적게 먹으라고 한 적은 많다. 아주 많다. 사춘기 전부터 이런 말을 듣기 시작했고 나이 마흔이 넘었는데도 들어야 하는 말이다.
차별은 대체로 무지와 악의없고 고민 없는 단순한 언행이 근간이다. 그리고 은연 중에 하는 사람도 당하는 사람도 모르게 매우 일상적으로 이뤄진다. 경험하지 않으면 정확히 알 수 없는 게 차별이기도 하다. 솔직히 알고 싶지도 않은 문제이기도 하고.
인권으로 오면 많은 특권층이 내가 왜 특권층이냐며 도리어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그 자리에 있다면 그 현실을 조용히 즐길텐데 굳이 피해자 코스프레를 해서 더 많은 사람을 각성하게 만드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나름의 절박함이 있긴 있는 모양이지만... 나도 약간 그 자리에 있는 게, 한국은 나이가 벼슬인데 내가 점점 나이를 먹고 있거든. 그리고 나는 아무도 모르게 아주 조용히 이 벼슬을 누리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