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주의를 처음 접하면 혹은 대략 풍문으로 주워들으면 마치 여성성이나 여성적인 게 겁나 나쁘고 끔찍한 거라고 생각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자본주의자는 돈을 버는 일에 비해 돈을 버는 사람을 보조하는 일이라 재화를 창출하지 못하는 가정주부는 하찮다고 생각하고 가부장적인 사람은 엄마는 위대하지만 어쨌든 집에서 편하게 놀면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많은 여성주의자가 가정주부는 사회생활에 비해 자아실현도 못하고 현실적으로 인정받지도 못하고 개인의 역량과 상관없이 어떤 틀에 사람을 쑤셔 넣는 일이므로 상대적으로 하찮다고 (혹은 나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국 사람은 대부분 자본주의적 사고를 하고 가부장적이다. 자칭 여성주의자라는 사람도 앞에 두 가지 사고방식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여성주의자이기도 한 경우가 많다. 그냥 현실이 그렇다. 그렇게 배웠고 그런 사회에서 자랐고 거기서 벗어나는 건 힘든 일이다.
흔히들 디즈니가 그릇된 여성성을 어필하고 아이들에게 주입했다고 많이들 비판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미녀와 야수지 야수와 미녀가 아니다. 미녀와 야수의 주인공은 벨이고, 이 벨이라는 캐릭터에겐 성격과 특징이 있다. 그나마 야수는 나름 캐릭터가 있음. 신데렐라 왕자님은 심지어 이름도 없음. 아니, 챠밍이 이름인가? 그렇담 이름이 매력덩어리여. 이건 설정이지 캐락터가 아니다. 인어공주도 왕자 이름 기억남? 심지어 인어공주에 나오는 왕자는 스토리를 만들기 위해 그냥 거기 있느라 희생되는 경향이 있다. 겁나 줏대가 없어요.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 여자 주인공은 캐릭터 구축이 굉장히 잘 되어 있다. 한국 드라마에서 남주의 여친이 아닌 진짜 여자 주인공을 떠올려보면 된다. 별로 없다. 진짜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별로 없다. 아무리 번듯한 직장을 갖고 어엿한 부모를 갖고 있는 여주도 그냥 그런 설정을 갖고 있는 멋진 남자 주인공의 여친일 뿐이다. 옛날에 아줌마란 드라마가 있었는데 그 드라마는 오삼숙이 주인공이었다. 못 배우고 가정주부고 창피할 정도로 억척스러운 아줌마였지만 그래도 나름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이 있고 여러 가지 사건으로 세상 보는 방식이 바뀌고 스스로 독립을 선택하는 잘 만들어진 캐릭터였다. (덧붙여 아줌마의 남편 장진구도 진짜 잘 만들어진 세상 둘도 없는 찐따 캐릭터임. 장진구 같은 새끼라는 말이 유행했을 정도로.) 지금 생각하면 옛날 드라마 여자 캐릭터가 훨씬 좋았던 듯.
여튼, 디즈니도 요즘 많이 변해서 공주라고 꼭 왕자의 마누라가 될 이유는 없고 그냥 출신이 공주고 평민 남편을 데려오는 분위기가 되긴 했다. 일찍이 뮬란이 평범한 남자와 사귀고 왕족이 되는 영광을 거절하긴 했지만 그때 흥행에 그다지 성공을 못하면서 디즈니는 다시 공주님들에게 돌아갔다. 서사로만 보면 디즈니에서 나름 진보적인 영화였으나 그딴 건 아무래도 좋고 아시아인이라 눈을 삐쭉하게 그렸다고 욕먹은 기억이 난다. 이전 디즈니 공주와는 다른 강함이 있는 여자 캐릭터를 아시안으로 표현됐다는 건 개나 줘버리라지?
그니까 어디에 초점을 맞춰서 보는가가 중요하긴 하다. 그리고 나는 디즈니에서 그렸던 이른바 '고전적'인 여성성이 싫지 않다. 오히려 좋다. 신데렐라는 가정폭력의 피해자로 굉장히 오래 살지만 긍정적인 성격이나 친절함이나 상상력을 잃지 않는다. 자기가 폭력을 당한다고 자기보다 약한 상대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않는다.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가 아니라 그냥 막 울기도 하고 동물 친구들한테 언니랑 새엄마 뒷다마도 깐다. 신데렐라가 애초에 왜 무도회에 가고 싶어 했는지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신데렐라에겐 그냥 휴가가 필요했다. 그냥 자기를 학대하는 집구석에서 벗어나서 바깥세상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미녀와 야수에서 벨은 문화라고는 없는 좁아터진 시골에서 사는 아싸 혹은 은따다. 동네 사람들이 다 '쟤 좀 이상해'해도 동네에서 제일 잘 나가는 애가 '나는 돈 많고 잘 생긴 훈늉한 신랑감, 넌 이쁘니까 좋은 신붓감'이라고 해도 귓등으로도 안 듣는다. (특이한 건 게스통도 벨의 실제 성격이나 그런 건 개똥 신경도 안 쓴다. 진짜 동네에서 제일 예뻐서 좋아한다. ㅋㅋ;;) 벨은 자기 나름대로 한 성깔 하지만 동시에 사회적 위치나 외면보다는 상대방의 지성을 사랑하는 캐릭터다. 그리고 벨은 야수가 자신을 인간으로 대할 때 비로소 야수에게 관심을 보이고 친절을 베푼다.
알라딘에서 자스민 공주는 주인공은 아니었지만 자유를 갈망하는 캐릭터이다. 부를 갖고 있지만 여자라서 자유를 못 갖는 자스민, 가난해서 자유를 못 느끼는 알라딘, 누구보다 강하지만 스스로 자유를 얻을 수 없는 지니. 알라딘은 자유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자유롭지 못하면 나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교훈도 있다. 지니에게 자유가 없으면 알라딘이 자유를 얻지 못하고 평범한 백성인 알라딘에게 자유를 주지 못하면 공주인 자스민도 자스민의 아버지인 왕도 선택의 자유를 얻지 못한다.
디즈니의 모든 여자 캐릭터는 자기 나름의 욕망이 있다. 공주라는 타이틀은 그들이 가진 장점에 대한 상에 가깝다. (물론 이러니 저러니 해도 여자에게 가장 좋은 상이란 좋은 남편 만나는 거라는 구시대적 발상이긴 하다. 근데 그 시대가 실제로 구시대긴 했다.)
디즈니는 보수적이고 계급을 어필하고 내면의 아름다움 운운하면서 결국 미남백인왕자나 갖다 놓는 것도 사실이다. 예전엔 인종차별적인 면도 있었다. 몇몇은 정말 비판해도 마땅할 문제가 있긴 해도 보수적인 것 자체는 비판의 이유가 되지 못한다. 그리고 저런 여성성은 고전적이지만 나쁜 게 아니다. 굽히지 않는 친절함은 나쁜 게 아니다. 좋은 거다.
디즈니가 여자캐릭터의 노선을 바꿨다고 해도 여자 캐릭터에게 제대로 된 성격과 서사를 부여하는 것은 바뀌지 않았다.
이미 예전부터 여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거의 유일한 스튜디오라고. 전 세계의 여자애들이 단순히 허영이나 예쁜 옷 때문에 디즈니 공주를 좋아한 건 아니다. (흥행 패턴을 보면 이쁜 옷이 중요한 것 같긴 하지만--)
덧붙여 디즈니는 진짜 애니메이션을 잘 만든다. 게다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 OST도 디즈니 영화(라이온킹)임.
결론 : 나는 디즈니와 디즈니가 만든 애니메이션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