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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진지하다

'아빠 뭐하세요?'의 엄마

여성주의가 뭔지 알기도 전부터 나는 여자 캐릭터를 더 좋아했다. 여자가 세고 능력 있고 어쩌고 이딴 거 별로 상관없고 그냥 평범하게 잘 만들어진 여자 캐릭터에 빠지고 그런 점이 티비든 영화든 만화든 소설이든 매체를 즐기는데 큰 요소가 됐다. 실은 여자든 남자든 잘 만들어진 캐릭터라면 다 좋은데 현실적으로 잘 만들어진 여성 캐릭터가 드물다보니 더 반가웠던 모냥?

 

어렸을 때 미국 시트콤 '아빠 뭐하세요?'를 정말 좋아했다.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엄마 서사를 참 좋아했더군. 본지 한참 되서 조크는 다 잊어버리고 기본적인 설정만 기억이 나는데 엄마 서사는 기억이 나고 애착이 생기더라고. 

1991년에 시작해서 8년을 방영한 시트콤이고 KBS에서 더빙한 걸로 초딩 때 보던 기억이 나는데 초딩 때는 엄마 캐릭터가 그다지 임팩트가 없었다. 사고 치는 아빠(팀 테일러)가 웃음의 요소이기 때문에 이 시트콤을 열심히 보면서도 엄마의 존재에 대해서 그다지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깊게 생각할 정도로 비중이 큰 캐릭터도 아니고 엄마의 스토리라인이나 캐릭터 아크도 아주 조금씩만 변한다.

 

1시즌엔가 엄마는 애들이 어느 정도 컸으니 공부를 하겠다고 대학으로 돌아간다. 이때 애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아빠의 반응은 기억이 나는데 아빠는 엄마가 학교를 다니거나 일을 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내 기억에 엄마 전공이 상담심리학 같은 거였다. 엄마가 학업을 마치고 일을 하게 되는데 아빠는 자기가 하는 일(케이블TV 프로그램 호스트)도 잘 되기 때문에 굳이 '마누라 일 시키는 남자'가 되는 걸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싸움까진 아니지만 꽤 격하게 반대를 하고 엄마가 그거 때문에 굉장히 화를 내고 짜증을 내기도 한다.

 

솔직히 이 시트콤엔 내가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구석이 하나도 없다. 백인 중산층, 최소한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들. 부모님은 극단적으로 싸우지 않고 싸우고 나서 옆집 아저씨한테 마누라 욕을 하거나 술을 퍼마시거나 '이혼 안 하고 잘 참고 살고 있어요'따위의 농담도 안 한다. 화해도 이상적으로 한다. 그리고 결국 엄마의 의견을 존중한다. 엄마는 전형적인 현명한 엄마상이고 아빠는 사고뭉치지만 듬직하고 자상한 남편상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지만 아빠가 엄마의 의견을 존중하는 이유는 엄마가 현명하고 옳기 때문이 아니라 혹은 그냥 져주는 게 가정을 평화롭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엄마도 독립된 인간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아빠 뭐하세요에서 육체적으로 성장하는 건 세 아들이고 사회적 위치가 가장 많이 변하는 사람은 엄마이다. 그리고 멘탈이 가장 성장하는 건 아빠다. 아내가 자기와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자기와는 다른 꿈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지속적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거등. 이런 이유로 이 드라마는 아빠도 참 멋있다. 아빠는 남자답고 돈을 많이 번다고 뻐기지도 않고 아이들이랑 같이 시간도 잘 보낸다. 자식과의 관계도 디테일이 굉장히 좋다. 남자답고 싶어 하는 웃기는 아빠는 자기랑 닮은 개구쟁이 첫째 아들이랑 같이 자동차를 만들고 집도 고치고 운동도 하면서 잘 놀지만 엄마를 닮은 책을 좋아하는 둘째와의 관계는 어려워한다. 그래도 그 아이의 방식으로 친해지려고 노력한다. (막내는 기냥 귀염둥이로만 나온다. 실제로 굉장히 귀엽다. 그리고 이 기염둥이가 청소년기에 고스족이 된다.)

 

이 시트콤은 재밌기도 했지만 감정이입이 되서가 아니라 동경으로 봤던 걸 수도 있다.

엄마는 드라마가 방영하는 십 년이 넘는 기간 동안 가정주부에서 학생으로 학생에서 실습생으로 실습생에서 전문직을 가진 여성으로 그리고 그 와중에 계속 공부를 해서 교수가 된다. 전형적인 슈퍼우먼이라 애 키우고 집안일하면서 공부도 대빵 잘하는데 그로 인한 갈등은 별로 없긴 하다. 공부하느라 힘들어했던 것 같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척척 잘 해치웠다고 기억하는데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서 그런 건지 실제로 그랬던 건지는 잘 모르겠다. 지금이야 이런 전형적인 슈퍼우먼 별로지만 초딩 중딩 땐 질이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 시즌을 KBS가 아닌 다른 데서 이십 대 초반에 본 것 같다. 질이 인디아나에서 일(교수직?)을 구해서 팀이 하던 케이블 TV 쇼를 그만두고 질이랑 같이 이사를 하기로 결정한다. 애들도 다 대학을 가서 독립했고 그동안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원 없이 했고 이루고 싶은 것도 이뤘으니 이번엔 질 차례라면서, 역시 처음엔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나중엔 오히려 질을 응원해주고 밀어주며 이사를 결정하고 마지막 쇼를 하는 게 마지막 에피소드였다.

이 엔딩을 싫어하는 미쿡사람이 꽤 많았는데 (이 시트콤이 끝나는 거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았던 것 같다.) 나는 이 엔딩이 너무 좋았다. 시트콤 보다가 감동받아서 눈에서 궁물이 나올 뻔했지.

 

 

덧.

질은 팀의 일도 신경 쓰지만 함께 지은 집에 애착이 너무 커서 집을 떠는 걸 고민하는데 결국 집을 통째로 떠서 함께 이사 간다. 내 기억엔 이 집은 그렇게 지은 집은 아니지만 실제로 서구권엔 이동할 수 있는 집을 판다. 타이니하우스가 아니더라도 꽤나 큰 사이즈의 집도 그렇게 만들어서 팔고 광고도 실제로 그렇게 했었다. 하긴 작중 집도 나무로 지은 집이라 해체해서 가져갈 수도 있는데 현대 가옥이란 게 의외로 누더기처럼 짓는 거라 한옥처럼 (상대적으로) 예쁘게(?) 해체해서 옮기는 게 어렵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