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적인 질문이 떠오르는 삼십대 중후반이로다.
시작은 논문. 지금 내가 논문을 쓰려는 주제는 무려 3년간 갖고 있던 주제였다. 철학도 아니고 한 주제를 3년 이상 갖고 있으면 시효가 지났다고 생각하는 지라... 흥미가 떨어지고 있음. 이미 머릿속에선 나름 정리 된 걸 논문에 맞춰 써야하는 건데, 이게 의미가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의미가 있다는 걸 머리로는 안다. 이론적으로 내 생각을 정리하고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글을 쓰는 거 자체로 의미가 있지. 근데 또 다른 현실로 생각하면 내 인생이 석사 있다고 드라마틱하게 바뀌거나 도움이 되거나 하진 않을거거등=_=
내 인생이 드라마틱하게 바뀔 일이 없다는 건... 내가 일을 해봐야 출판편집자거나 문화기획자인데 이게 말만 번드르르한 전문직이지 나는 아직 전문가도 아니고, 이런데 취직이 될지 안될지도 모르겠고, 되도 돈을 많이 벌기는 커녕 쥐꼬리만큼만 벌테고, 그나마도 취직 안 되면 그냥 가까운데 아무데나 취직할 생각이다. 공장이든 식당이든 정말 아무데나 상관없음. 이미 난 식순이.
근데 이게 또 웃긴 게, 내가 이런데서 일한다고 하면, 옛날 동료나 학교 사람은 '도대체 왜?'와 함께 '넌 참 웃기는 인간이다'라고 하거든. 그러면서 마음에 드는 곳에 취직할 때까지 버티는 애들처럼 내가 버텨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는데...1. 버티려면 비빌 곳이 있어야 하는데 비빌 곳이 없다. 2. 취직을 안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다. 3. 일은 돈 벌려고 하는 거지, 거기서 대단한 의미를 찾으려고 하면 안된다. 물론 의미를 찾으면 좋겠지만 안된다면 현실에 적응할 필요도 있다.
나도 나름 문화나 출판 쪽으로 취직을 하려고는 했다. 많진 않지만 이력서를 써보긴 했는데, 다 안 됐거든. 심지어 어떤 데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고 잘 할 일이야, (사회생활 15년 하다보니 이 정도는 안다.) 근데 면접도 못 봤음. 그럼 뭐, 내가 이력서와 자소서를 더럽게 못 쓰던가 스펙이 딸리던가 아님 나보다 잘할 것 같은 사람이 많거나. 많은 이유가 있겠지. 실제로 자소서를 못 쓰기도 한다. 그리고 내가 그 일을 잘하고 그 쪽에 애정이 있다고 해도... 나보다 나은 사람도 있을 거고, 내가 죽었다 깨나도 꼭 이 것을 해야만 해! 이런 것도 없다.
그렇다고 내가 취직이 안 되서 '아, 나는 쓰뤠기야' 이런 생각이 드는 건 또 아니고. 요즘 난 그럭저럭 만족하면서 살고 있다. 오히려 이거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마음이 편하다. 여기서 그냥 돈이나 좀 벌고, 일 끝나고 와서 고양이랑 비비적거리면서 드라마랑 영화랑 만화책이랑 책 보고, 음식 좀 해먹고, 휴일엔 피아노 좀 치고... 그럼 되는 것 같단 말이지. 대단한 거 필요없고, 그냥 정상적인 일상을 가질 수만 있으면 되는 것 같다.
전에는, 아니 지금도 출판을 해서 내고 싶은 기획이나 책이 있긴 하다. 작업방식이나 이런 걸 전혀 다르고 나름 글 퀄리티나 전문성도 살리고 어쩌고 저쩌고 생각도 많이 했는데... 이걸 꼭 해야하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는 겁니다요. 어차피 내가 좋아하는 분야니까 나 혼자 읽고 찾아보고 공부하고 알아도 되는 거 아닌가. 이걸 뭐 꼭 책으로 내야해? 내가 소통하는 타입도 아니고. 이거 팔리면 또 얼마나 팔리겠어. 게다가 그에 따라오는 일은 또 어쩔겨. 하다보면 본질을 잃어버리고 정작 공부는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차피 수익사업을 해야하는 건데 돈에 밝은 것도 아니고.
생각을 하다보니 그 동안 내가 하고자했던 일이나 하고 싶어했던 일이 어느정도는 다 '공공성'을 띈다는 걸 알았다. 난 다른 기업이나 이익집단에서 직장생활하는 애들이 일 그만두고 싶다면 쉽게 그만두라고 하는데, 공무원이나 기관에서 일하는 애들이 힘들다고 해도 절대 그만두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거기 꼭 붙어있으라고 하지. 공공성을 띄는 일이라는 거 자체가 힘들다. 일 성격 자체가 쉽지가 않은 데다가 일하는 사람도, 일 시키는 사람도 '세금 까먹'고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열심히하기도 하고 빡세기도 하고... (참고로 난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부터 9급부터 5급공무원까지, 내 주변에 있는 공무원 다 통틀어서 칼출근칼퇴근 하는 사람 못 봤다=_= 제발 공무원은 일이 쉽다는 생각을 버려)
여튼 내가 공공성을 띈 일에 크레딧을 더 주는 건 알겠고, 그 일을 하고 싶은 것도 사실이지만... 안 되면 또 할 수 없는 거 아니겠음. 공공성이야 누구든 추구하면 되는 일이고. 나는 상황이 안 되니 소소한 이익을 보는 집단에서 일하면서 소소하게 돈과 내 시간을 교환하며 살면 되는 거지.
요즘 대략 이런 상태.
계속 근본적인 질문을 하다가 중간 지점에 도달한 것 같은데 그게 바로, 나를 안정화 해야겠다는 것. 정착이라고도 하지. 내 정체성과 내 현실이 어긋나는 거, 내가 정서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내가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다른 것 등등 이걸 일치시키고 싶어졌다. 그럴려면 환경적으로 어느 쪽이든 정착을 해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거 근본적인 질문이고 뭐고 그냥 나이들어서 꼰대가 된 것 같기도 하다. 흐규흐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