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별일없이 산다

ER 수다

미쿡 드라마. 15년 장수 방영. 의학드라마의 최고봉. 내 생각엔 인간드라마로서도 최고봉.
성장 드라마가 보고 싶으십니꽈? ER을 보세용. 가족드라마, 전문직종드라마, 액숑, 스필러, 로맨스, 코메디, 드라마 등 거의 모든 장르를 여기서 볼 수 있슈미다. 메인 캐릭터 6명, 서브 캐릭터 5명 정도, 그리고 회마다 주요 환자가 3-6명. 동시에 진행되는 이야기 6개-10개? TV를 틀어놓고 집중을 못해서 계속 채널을 돌리는 사람이라도 ER은 볼 수 있다. 1분이면 장면이 바뀌어요.

ER이 시작 된 즈음은 미국 드라마가 변화하기 시작할 때와 겹친다. 엑스파일, ER, LAPD 등등 종래의 형식과 이야기 구조를 벗어난 새로운 소재와 연출이 도입되던 90년대 중반. 어디선가(강명석인지 씨네21인지) 네 멋대로 해라 평론을 하면서 한국드라마는 네멋대로해라 이전과 네멋대로해라 이후가 있다고 하는 걸 봤는데, 미국드라마는 혹은 전 세계 드라마는 ER - 엑스파일 이전과 이후가 있다고도 할 수 있다. ER로 말하자면 종래의 의학드라마는 항상 환자가 주인공이었는데 ER에서는 처음 으로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들-단지 의사만이 아니라 간호사, 실습학생, 데스크 직원 등을 전면에 내세우며(그래봐야 주인공은 닥터지만=_=) 이야기 구조 자체를 바꿨고, 그러면서 연출 방식도 바꿔버렸다. 쏟아지는 대사, 인물과 함께 움직이는 롱테이크 스테디 캠 샷. (정말이지 나는 이 롱테이크 스테디샷이 너무 좋다.) 미국 TV 드라마 최초로 생방송 방영. (이후 웨스트 윙에서도 했다.)

ER에 온갖 찬사를 갖다 붙일 수 있지만, ER이 좋은 이유는 가장 기본적인 걸 가장 잘하기 때문이다. 이야기와 캐릭터.
이야기를 구현하는 방식, 설득하는 방식, 캐릭터 설정, 캐릭터의 변화와 성장, 무엇보다 모든 캐릭터와 이야기에 대한 작가의 애정.
갈등이 많고, 상황이 극단적이고, 화면이 역동적이라 보고 싶은 게 아니라 인물과 이야기 자체에 매력을 느끼게 하는 정말 기본에 너무나 충실한 드라마. 누구나 성공하고, 누구나 실패하고, 누구나 순간에 충실하고 열심히하고, 누구나 게을러지고 깽판을 치고, 그리고 누구나 변한다.누구나 가족이 있고, 누구나 자라난 환경이 있고, 모든 시청자가 모든 캐릭터를 이해할 수 있다. '어두운 과거'가 어느 날 갑자기 한번에 생기지도 않고, 사건은 쌓이고, 과거가 있어도 내내 죽상을 쓰고 다니지 않는다. 성격이 좋다고 항상 늘상 헤실거리며 사는 것도 아니다. 사람과 환경이 변하는 과정을 너무나 사실적이고 너무나 섬세하게 그려낸다. 그리고 이런 걸 다 그리면서 너무 웃기고 재밌다. 웃겨, 웃긴다고. 너무 웃겨. 고급 유머부터 진짜 바보같은 슬랩스틱까지 드라마 ER의 세상에서 허용하는 모든 것을 보여준다.
ER은 사람이 사는 모습을 시종일관 따뜻하게 지켜본다. 누구나 바라는 거 아닌가. 다른 사람이 사는 모습을 그렇게 바라보고, 내가 사는 모습을 다른 사람이 그렇게 바라봐주기를. 가르치지 않고, 사는 게 그렇지라고 말해주는 것. 하지만, 조언과 관심은 아끼지 않는다. 이런 연출방식에 이런 이야기- 이렇게나 만들기 힘든 드라마를 15년이나 이끌 수 있었던 힘은 역시 이야기와 캐릭터, 그리고 그에 대한 애정이다. 나는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다 본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한다. 그렇다고 판타지만 있는 건 아니다.
ER의 시간은 천천히 간다. 절대 '그리고 햄볶고 잘 살았대요'하지도 않는다. '지금도 죽도록 힘들게 버둥대며 살고 있어요'라고 하지. 보통 이야기처럼 끝을 보지 않는다. 좀처럼 희망을 주지도 않는다. 사랑으로 모든 걸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사랑도 변하는 순간이 있는 거고, 아무리 사랑해도 사랑만 보면서 살수도 없고, 그것만으로 참는데는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 해결 방식도 천차만별. 도망가기도 하고, 남에 의해서 억지로 해결하기도 하고, 스스로 이겨내기도 하고,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외면하며 그냥 흘려보내기도 한다. 누구든 떠나고 나서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잊어가는 것도.

마지막 시즌에 원년 멤버가 나온다길레 마지막 몇 에피소드와 종영 특별방송을 보고 슴가가 뻐렁쳐서 사 놓고 못 봤던 시즌6 DVD 꺼내서 다 보고, 다시 1시즌 꺼내서 보다가 결국 다 달렸다. 원년 멤버를 생각하면 눈 알에 웬 국물이... 하다못해 원년 멤버는 데스크 직원까지 좋다니까. 확실히 뒤로 갈 수록 캐릭터나 이야기 구조가 조금 느슨해진다. (연출도, 음악도 좀 과해지는 것 같고.) 어쨌든 뒤로 갈 수록 인물에게 너무 과도한 갈등과 사건을 부여해서 보기가 안쓰러울 지경이다. 초반에는 사소하고 생활에 밀착한 사건과 갈등이 드라마를 만들었는데 그럼에도 충분히 극적이고 사랑스럽고 그래서 더 공감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뭐, 후반으로 가도 충분히 괜찮은 드라마이긴 하다. 기본적인 퀄리티가 어디가진 않지. 설사 시간이 지나면서 그 드라마 자체의 퀄리티가 떨어졌다고 해도, ER은 끊임없이 TV 쇼에서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는 이야기를 다루며 고군분투한다. 그렇다고 강력하게 뭔가를 주장하며 외치지 않는다. 메시지는 확실하지만 가르치지는 않는다. 극중 인물이 모든 사건을 통해 배우고 시간시간 변해가는 걸 보여줄 뿐이다. 
ER를 있게한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한다. 15년의 시간. 자신들만의 역사를 만든 사람들. 멋있다.


and Cater, Kovac, Abby Lockhart.
그리고 저긴 없지만, 접수직원 제리, 간호사 할레, 추니, 말릭 등등.
I'm going to miss you so damm much.


덧. 간단 ER 소개.
시카고에 있는 카운티 제너럴 하스피탈 응급실이 드라마 ER의 배경이다.
미쿡의 시립 응급실. 인근에서 사고가 나면 이 쪽으로 오고, 주로 가난한 사람이 오고, 의료보험없는 사람이 온다. 노숙자는 목욕하러 오고, 겨울엔 추우니까 자러 오기도 하고, 갱은 총 맞아서 오고, 싸우다 오고, 사고나서 오고. 길바닥에서 총질을 하다 응급실에 실려와서 2차 전쟁을 하기도 하고, 의료사고로 결과가 안 좋았던 환자나 가족이 의사를 폭행하기도 한다. 10불이면 길바닥에서 총을 살 수 있고, 교통사고로 사람을 죽여도 사고에 따라 5년 뒤면 다시 면허증이 나오는 그런 나라의 응급실인 것이다.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요즘 말이 많은 3교대조도 아닌 2교대조로 일한다. 기본 12시간, 길면 32시간. 의사가 보는 환자 수는 40명 정도.  교육도 하기 때문에 대학생들 실습하러 온다. 학생 가르치면서 환자 보고, 진료하면서 서류도 봐야한다. 시카고 시와 병원은 매년 예산 삭감한다며 직원 자른다고 난리고, 간호사들에게는 봉합용 실을 아껴쓰라는 지침을 내린다. 이 난리 속에서 대부분의 의사는 학생 때 빌렸던 (사립학교의 숨막히게 비싼) 학비를 갚으면서 생활을 꾸려가야한다. 간호사는 의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고, 의사에겐 일용직이 없지만 간호사는 일용직도 있다. 응급실에서 일하는 것은 노가다인데다가 냄새도 나고(...) 아무도 여기서 일하길 원치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데서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누구든 사랑하게 될 사람들이 ER에 있다. 한번 개미지옥에 빠져보시라.
나 혼자 빠져있기는 아깝기도 아깝고, 억울하다. 잘 만든 드라마의 제일 나쁜 점은 이걸 보고 나면 다른 드라마가 재미가 없어요=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