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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없이 산다

에쿠우스

1. 말말 거리면서 보자고 해놓고 보자고 해놓고 (아프다고, 일이 있다고) 내뺀 동행. 내 것도 취소해 버릴까 하다가 작품 자체가 좋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그냥 혼자 봤다. 왜 말말 거렸는지 알겠다. 덧붙여 상당히 어둡고 어떻게 보면 철학적인 내용인데, 이걸 본 대부분의 관객의 감상도 말로 시작해서 말로 끝날 듯. (직업병인가, 공연이든 영화든 볼 때 주변 반응을 꼭 보는 편이다. 그리고 결과는 역시나임.)

2. 그리고 나의 감상을 한줄로 말하라면 '아, 씨발...저 색히가 이해가 간다 orz'
알런 색히는 그의 환경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어떻게 욕망을 발산하고 스스로 파멸하는가에 대해 정서적으로 이해가 가고,
다이사트 (찌질이) 색히가 알런의 욕망을 질투하고 부러워하는 게 이성적으로 이해가 간다. (아니. 거꾸로일지도.)
내가 본 건 조재현-류덕환-박서연이 나온 거였는데, 다른 경우에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조재현-류덕환의 다이사트와 알런은 동인인물이라고 볼 수도 있어서 이렇다 저렇다 해봐야 결론은 '이해가 간다'. 여기에 '씨발'이 붙는 이유는, 관객의 90%가 '우왕~ 말~'하면서 내용에 이입을 못하고 있는데, 나 혼자 '아...저 색히...' 이러고 있는 게 좀...=_= 나는 이런 거 이해하고 싶지 않아요.

3. 원작이 난해하다고 하지만, 대사를 보니 그냥 친절하지 못한 것 같은뎁. 원작을 직접 읽지 못해서 확실하게 말할 순 없지만...
1막의 중반까지는 알런의 성장에 대해 표현하는데 구성이 좀 엉망이다. 그리고 그게 연출이 나쁘다기 보다는 대본 자체(특히 알런 부모)가 좀 들쭉날쭉하다는 생각이 든다. 설명은 충분히 하기는 한다. 모든 대사에 배경이 나오니 끝까지 보면 정리가 되긴 된다. 근데 그게 참...하여간 좀 그래. 어떤 사람은 알런 엄마가 알런을 때리기 전까지 저 아줌마가 이상하다는 걸 못 느끼더라고. 하긴 그 부부 연기가 참 묘하기도 했다. 엄마는 좀 더 히스테릭한 종교인으로 표현되고 아빠는 좀 더 콤플렉스 덩어리로 보여져야 했는데. 아부지는 전형적인 그냥 시골 아저씨. 어머니는 신앙심 깊은 평범한 아줌마로 나온단 말이지. 
어쨌든 내가 알런이나 다이사트를 이해하는 건 그냥 알아서 앞뒤 맞추고 정리해서 이해하는 거지 연극 자체가 끝내주게 잘 빠져서가 아니다. 연극열전 시리즈는 일반인 상대로 장사하는 거라며, 이래서야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게 당연하다는 생각도 든다.

4. 다들 연기 잘한다고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을 해대니 나까지 거들 필요는 없을 것 같고. 덧붙이면 나는 연기 제일 잘한 게 말 같다.
알런과 다이사트의 이상이자 욕망, 영웅, 신, 억압인 한 마디로 두 사람을 압도하는 이상적 존재인 말로 표현이 잘 됐다. 분장도 좋았고 몸짓도 좋았다. 알런, 다이사트보다 상대적으로 커 보이는 덩치도 좋은 효과를 냈다고 본다. 너무 압도한 나머지 관객 머릿 속에 말만 남아있는 것도 문제긴 하지만, 이쪽이 맞는 것 같다. 연기라기 보다는 연출을 잘했다고 해야겠지만. 연출에 관해서는 커튼콜 때 말이 관객석으로 가는 서비스는 확실히 시망. 나는 오늘도 공연장에서 뿜고 말았네.

5. 가기 전에 호평도 들었지만, 특히 다이사트가 이해가 안 간다는 이야길 들어서 걱정을 좀 했는데(특히 그리스 운운하는 것에 대해),
다이사트의 그리스는 그냥 구석에 처박아 놓은 꿈이다. 그리스든 말이든 상관없는 거지. 그리스를 너무 어필하긴 한 것 같다. 실제의 그리스를 아는 사람이라면 더욱 방해가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그냥 첨부터 접어두고 봤다. 
에쿠우스는 상당히 종교적이다. 종교에 억압받고, 욕망에 대한 발산 또한 종교(!)를 통해서 한다. 우상의 창조와 그에 대한 광기, 분열, 파괴 그리고 자멸하는 것이 모두 종교적이다. 근데 이 부분이 좀 희석 된 것 같다. 오히려 다이사트의 헛된 그리스 신들에 대한 찬양때문에 더 그렇게 된 것 같기도 하다. 연출도 좀 더 종교적인 극대화를 넣어줬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먼. 나는 어떠한 종교색이든 조금만 과하다 싶으면 구역질을 느끼는 경향이 있지만...그래도 연극에 맞추려면 더 종교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해. 하긴 우리나라가 아직은 충분히 종교적이지 않은 것도 이유가 될 수 있을 것도 같다. 연출도 관객이 받아들이는 것도.

6. 질 아가씨. 좋은 녀자잖아=ㅁ= 이런 좋은 녀자 앞에서 개쪽을 당하다니 알런이 말의 눈을 찌르는 게 더욱 이해가 가는군하-가 아니라.
노출씬을 어떻게든 안 보이게 하려는 연출이여. 나에겐 그런게 오히려 더 웃겼다. 하기야 사람들 말에 집중하는 거 보면 거기서 노출이 더 되면 아름답지 않은 반응을 보이겠지. 스터디 하는 도서관의 스터디룸 벽에 누군가 '성'이라고 크게 써놨다. 나랑 내 친구는 씨익 웃으며 '어떤 놈인지 년인지 귀엽구나'라고 했다. 성이라는 글자만 봐도 야하게 느껴진다는 거지. 그런 나이인 게야.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다른 사람이 벗기만 해도 맥락과는 상관없이 야하게 느껴진다는 것이고. 아줌마들이 조인성 엉덩이 보려고 쌍화점 본다는 말에 개폭소 한 기억이 있구만요. 이런 거 보면 인간들 좀 불쌍한 듯-.ㅠ

덧. 물랑루즈의 크레딧을 보면서 '도대체 이안 맥그리거는 어디에 나온거지=_=' 했던 나는, 1막이 끝나고 홀에 나와 캐스팅을 본 후에야 '아, 알런이 류덕환 맞구먼.'했다. 트레인 스포팅으로 이안 맥그리거를 기억하고 천하장사 마돈나로 류덕환을 기억하니...쩝.
뭔가 더 할 말이 있을 법도 하지만 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