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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없이 산다

우울증 환자가 사는 법

지난 이틀동안 씻지도 않고 밥도 안 먹고 물도 안 먹고 먹은 게 없으니 화장실도 안 갔고 엎드려서 누워서 만화만 봤더니 제발로 쓰레기통에 들어가기 직전이네요. 그러나 우리집엔 종량제 봉투만 있고 쓰레기통은 없다네. 우얏든 갬성에 빠져서 한 썰 풀어봄. 

 

대략 지난 8년간 하루에 10시간에서 15시간씩 일했다. 그 와중에 고양이도 한마리 키우고 체리 블루베리 사과 등 과실수도 키우고 장미나 작약 구근식물 등 꽃도 엄청 많이 키웠다. 피아노도 치고 그림도 그리고 서예도 하고 아프면 운동도 하고 하여간 가만히 있질 않았다. 인생의 처음 33년 정도는 잠을 깊게 잔 날이 없는데 몸을 혹사 시키며 산 지난 8년 간 머리만 대면 자고 눈 뜨면 아침이었다. 매일매일 경험해도 부족함이 없는 숙면. 겁나 좋다. 장담하는데 잠만 제대로 잘 자면 일단 정신병리쪽 질환의 절반은 관리 가능하다고 본다. 누군가 몸을 혹사 시켜서 쓰러지듯 자는 건 안 좋은 거 아니냐고 하는데 나는 왜 나쁜지 모르겠음. 약을 먹든 몸을 혹사 시키든 일단 숙면을 한번 해보랑께. 진짜 좋다고. 

 

근데 지금은 일도 조금 하고 고양이만 겨우 건사하고 있다. 일하는 시간은 대략 10시간이지만 그 10시간 중 실제 일하는 시간은 2시간 정도고 나머지 8시간은 놀고 자빠져있으니 일한다고 할 수가 없겠지. 여튼 취미생활은 몸과 머리를 쓰지 않아도 되는 것 빼고 대부분 그만뒀고 식물도 반 이상 말라 죽었다. 이렇게 된데는 귀찮다는 게 제일 크지만, 궁극적인 이유를 들자면 아마 우울증이 있을 것이다. 

 

나는 살기 위해서 사는 게 좀 힘든 인간이라 그 시간을 뭘로든 채워넣어야 한다. 별 특별히 의미가 없어도 되고 목표가 없어도 되고 딱히 엄청난 기쁨을 주지 않아도 된다. 그냥 이 살기 위해 살고 있는 시간이 적당히 견딜만 하면 된다. (근데 우울증과 상관없이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살지 않나 싶기도 한데 말입니다.) 그런데 우연히도 나는 일을 그럭저럭 잘 한다. 특별히 잘하려고 하지 않아도 그냥 잘 한다. 별로 어렵지 않고 스트레스 받지도 않는다. 잘 되도 방방 뛰지도 않고 망해도 좌절하지 않는다. 그래서 일을 한다. 했다. 

 

문제는 이 시스템이 건강하게 살수는 있지만 정신에너지도 엄청나게 빨아먹는다는 거임. 그래서 지금처럼 빵구가 나는 거다. 에너지 고갈. 이걸 번아웃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번아웃은 몸이 힘들어서 뻗는 건데 내 경우는 살기 위해 산다는 에너지까지 빨려 의미와 의지를 잃어버린 것에 가깝다. 현재 내 컨디션은 내가 꼬라박은 것 외에 딱히 번아웃 증상이 없다. 육체적인 번아웃증상은 하루에 노가다를 14시간씩 1년 가까히 했던 5개월 전에 있었고 그 때는 일에 치여서 살기 위해 사는 것에 대해 아무런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여튼 애초에 삶에 대한 의미와 의지가 없는데 그걸 또 잃는다는 게 이상하긴 하지만 여튼 그런 느낌에 가깝다. 하나 안하나 결과가 같음. 다만 몸이 건강한가 아닌가의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거대한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이럴 때 게임을 하자니 그건 취미가 없고 드라마랑 만화만 줄창 보자니 (지난 두달간 미친듯이 하고 있는 짓이 이거임.) 몸이 안 좋아진다. 목과 허리가 아프고 머리가 아프고 눈도 아프고 온 종일 가만히 있으니 잠도 못자고 제대로 된 식사를 못하고 움직이질 않으니 소화가 안되고 짜증이 늘고 생각을 못하고 이틀에 한번 겨우 씻으니 냄새나고 뭐 이렇게 생존 자체가 거추장스럽고 힘들어지게 된다. 덕질을 누구보다 잘하지만 덕질을 누구보다 잘해서 그 폐해도 정통으로 맞는 편=_= 하긴 어느 한가한 인간이 하루에 15시간씩 영화를 보고 만화를 볼 수 있겠는가.

 

그래서 다시 일을 조금씩 늘리고 있다. 일은 할 수 있으니까. 돈은 그다지 많이 벌지 못하지만, 애초에 돈을 많이 벌 필요도 없다. 먹여살릴 처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고양이랑 나만 그냥저냥 먹고 살면 되니까. 물욕도 없다. 정확히는 단도리해야하는 물건이 늘어나는 걸 싫어한다. 집이 크면 그만큼 청소를 해야하는데 우울증이 심해지면 세수도 안하는 인간이 청소는 하겠어? 집이 거대한 쓰레기통이 될 뿐이다. 더 큰 쓰레기통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작은 쓰레기통에서도 안 살아봐서 그렇슴. 크든 작든 쓰레기통은 쓰레기통일 뿐이다. 물론 아줌마를 불러도 되지만 왠지 제 정신일 때 아줌마 부르게되지 그 상태일 때는 아줌마도 못 부름. 사람을 구하고 부리는 것도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되는 일인데 씻을 에너지도 없는 인간이 어떻게 사람을 부르겠나.

지금은 차가 없지만 내가 차를 팔기 직전의 상태가 딱 누가 버리고 간 대포차였다. 6개월 이상 운행도 점검도 세차도 내부 청소도 하지 않고 그냥 세워만 뒀었다. 

 

어쨌든 살기위해서 하는 일이란 건, 그냥 할 수 있는 일이면 된다. 특별히 생산성이 높을 필요도 없고 대단히 보람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하고자 하면 얼마든지 보람을 느낄 수도, 일정정도까지는 생산성도 높일 수 있다. 그러려고 한다. 이 꼴난 인생에 어느정도 의미 부여를 하긴 해야하지 않겠슴. 

 

내가 한국에서 나고 자란 여자임에도 임신과 출산에 관심이 없는 건 그 '일'이 생산성이 거의 제로이다 못해 사실상 마이너스이고, 보람이나 비젼은 없고 자위와 정신승리에 더 적합한 활동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애를 키우는 건 기본적으로 감정적으로 양극성장애를 앓겠다고 스스로 뛰어드는 거나 마찬가지다.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다면 내가 말해주겠음.

아이라는 존재와 출산육아라는 현실은 당신에게 최고의 기쁨을 선사해주기도 하겠지만 끝없는 절망도 줄 것이다. 조증과 우울증을 하루에도 열두번씩 경험하고 싶다면 임출육하면 됨. 그리고 한번하면 기본 20년은 빼박 그 짓거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에요. (참고로 내가 우울증을 그럭저럭 다루게 되는데도 20년이 걸렸음. 그 사이 두 번 자살시도 했음.) 일은 때려칠 수 있고 결혼은 이혼할 수 있지만 출산육아는 그냥 견디는 거 외에는 답이 없다. 

특히 전업 가정주부라면 엄청난 보람과 희열도 느끼겠지만 동시에 사회적으로 매장되는 과정을 10년 이상에 걸쳐 육체적 정신적으로 단계적으로 느끼고 깨닫고 경험하게 될 거임. 애초에 매장당할 사회적 위치라는 게 없는 사람이 아닌 이상 굳이 전업주부를 할 이유가 없다. 개고생을 하더라도 애 낳고 키우는 20년만 살 생각이 아닌 이상 그 이후를 생각해서라도 일은 해야함(=경제권이 있어야 함). 

 

그러니 그냥 임신출산육아 그 자체로 (환경과 배우자의 상태와 아이가 어떤 인간이 될지는 다 내다버리고) 그냥 그 자체로 의미와 기쁨을 얻을 수 있는 사람 아니면 딱히 할 필요도 의미도 없는 짓거리가 임신출산육아 되겠습니다. 엄청나게 애국자라 국가에 이바지 하고 인류의 생존이라는 대의에 숟가락을 얹기 위해 애를 펑펑 낳고 키우겠다고 하는 건 또 다른 이야기인 듯. 이것이 바로 저세상텐션 아니겠슴꽈. 나로서는 도저히 범접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따. 실제로 내가 이런 사람을 많이 아는데 진심으로 위대하신 분들이라고 생각한다. (그 중 한명은 남편이 군인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부부가 나란히 골수기독교인이다. 그 중엔 목사가 중매를 서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결혼한 커플도 있는데 진짜 싸움 한번 안하고 애 셋 낳고 잘 산다고 함. 충격적일 정도로 찰떡이라 병먹금 당함. 이들에겐 내가 그린 듯한 등신이겠지.) 

 

생각해보니 나의 몇가지 특징을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괜찮은 '마누라와 엄마'가 될 재질로) 받아들인 남자들이 몇 있었다. 적당히 경제력이 있으면서도 과소비를 안(?) 한다거나 사회적 금전적 계급에 따른 별편견이 없다거나 보통 여자들처럼(?) 감정이 들쭉날쭉하지 않다거나 하는 것들을 자기 좋은 식으로 받아들인 거지. 웃기게도 나의 우울증이나 파괴적인 사고방식을 자기가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한 남자도 있었다. 세상엔 재밌는 종자들이 참 많은데 왜 이렇게 사는 재미가 없는지 모르겠당께. 

 

 

여튼.

그냥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그게 우울증이든 성격이든 어떤 상황이든 일단 받아들여야 한다. 좋든 싫든 우울증이 있는 건 있는 거고 이건 고치는 게 아니라 잘 관리하면서 데리고 사는 컨디션이라고 보면 된다. 그렇게 받아들이고 좀 가혹하지만 일을 ㅈㄴ 하면서 건강한 생활을 하고 비교적 건강한 몸을 만들었더니 몸이 우울증을 되게 싫어한다는 걸 알게 됐다 =_=;;

한번 그 상태에 빠져서 3일 이상 씻지 않으면 온몸에 발진이 난다던가(병원에 안 가도 씻으면 싹 없어짐. 웃길 정도로 심하게 일어나는데도 씻기만 하면 정말 싹 없어짐.) 이렇게 덕질을 심하게 하면 안압이 오르거나 모니터만 보고 있었는데도 갑자기 눈에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난다. 이건 약을 써도 효과가 그냥저냥인데 잠을 좀 많이 자고 산책을 하면 없어진다. 마음 놓고 우울증 증상을 펼치지도 못 하게 된 거지. 이거이 바로 인지부조화임. 

물론 스트레스로 인해 역류성식도염이나 과민성대장증후군 같은 것들이 발동되면 약을 먹어야 낫는다. 사실 그 상태가 되면 먹고 싸는 걸 안하기 때문에 간이 썩을 지언정 위하고 대장은 얌전함. 그냥 무기력증으로 인해 일상생활을 놓아버리는 걸 못하게 됐다는 거임. 물론 우울증이 피부발진을 왜 못이기냐고 묻는다면... 그건 전신에 발진이 안 나봐서 그렇슴. 우울증이고 뭐고 가려운 건 가려운 거다. 차라리 아픈 게 낫지 가려운 건 좀 =_=;;;

 

죽고 싶다는 건 변하지 않지만 딱히 자살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는다. 사는데 그만큼 요령이 생겨서 살기 위해 사는 게 이젠 그렇게까지 힘들지 않은 것도 있고 무엇보다 생각보다 자살이 쉽지 않다. 어설프게 자살했다가 망하면 그야말로 살아있는 시체상태로 1년 이상 살아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자살시도 후에 우울증이 더 크게 온다. 염두하고 있다면 각오하고 확실한 방법을 찾아서 제대로 해야함. (근데 대부분 자살을 충동적으로 하지.) 무슨 짓을 하든 하여간 실패의 가능성은 항상 있는 거니까. 난 좀 등신같아서 실패한 것 같지만. 

 

 

내일은 일을 해야하므로 발진 생기기 전에 씻고 눈에 안약 넣고 자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