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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섹슈얼리티의 구성요소

나는 시간이 나면 나에 대해서 생각하는 인간이다. 내 경험으론 그게 나쁜 게 아니다. 그래서 누구든 자기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심심하면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물론 생각 안 하고 살아도 먹고 싸는 데는 별 문제없다. 생각하기 싫으면 안 하면 된다.) 내 경우엔 나의 우울증의 기원은 무엇인가를 제일 오래 생각한 것 같다. 짧은 인생의 역사, 나의 사고방식과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과 환경을 끝없이 파고들었는데 그게 내가 정체성을 찾고 정립하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미국애들은 섹슈얼리티를 끊임없이 생각하며 정의하고 재정의하고 또 정의하다가 섹슈얼리티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생각하는데 다달았다. 섹슈얼리티의 구성요소이다 보니 성적인 요소가 있지만 내 생각엔 정체성의 구성요소와 거의 같지 싶다. 거의 모든 사람에게 성은 삶에서 아주 크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니까. 물론 사람에 따라 어떤 요소는 더 중요하고 어떤 요소는 더 가볍게 생각되거나 다뤄질 수 있다.

아래서 이야기 하는 섹슈얼리티의 구성요소는 헤더 코리나의 S.E.X ; the all you need to know sexuality guide to get you through your teens and twenties를 참고했다.

 

 

-성정체성과 성지향성.

몸의 성별과 내가 인지하는 젠더, 내가 표현하는 젠더, 내가 성적 매력을 느끼는 성별 혹은 젠더가 있을 것이다. 제 아무리 '남자다운 남자', '여자다운 여자'라고 해도 한 사람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이 사회와 문화가 요구하는 젠더와 완전히 맞아떨어질 수는 없다. 이건 인간이 타고나는 것도 제각각이고 교육도 중구난방으로 받는 데다 성장하면서 변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사회도 변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사회에서 요구하는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이 항상 같지가 않다. 그러니 이런 걸 생각할 때 너무 틀 안에서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냥 순수하게 자신의 몸과 마음의 젠더에 대해 생각해보면 된다. 그걸 꼭 여성성이나 남성성으로 나눌 필요도 없다.

 

-몸.

대부분의 생명은 물질로 이뤄져 있고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한 물질(몸) 안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이 물질을 굉장히 당연하고 편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대부분의 인간은 자기 몸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하고 평소 내가 움직이는 구동 범위가 내 몸의 구동 범위라고 쉽게 생각한다. 근데 그게 꼭 그렇지가 않다. 당연히 몸에 따라 생김새도 다르고 몸이 가진 능력도 사람마다 다르다. 하지만 몸을 이리저리 굴려보고 알아낸 게 아니라 그냥 내 성향에 맞춰 쓰면서 그게 다라고 생각하는 건 지양할 필요가 있다. (역시 아니라도 대체로는 먹고 싸는데 별 영향이 없다. 편하게 살고 싶다면 편하게 살아도 됨.)

 

세상엔 간성이란 사람들이 존재하는데, 본인이 간성 인지도 모르고 사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생식기의 외양이 눈에 띄게 다르면 간성인지를 알게 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평생을 모르고 살 수도 있는 것이다. 애초에 우리의 성별은 태어났을 때 의사가 아이의 생식기를 보고 (혹은 태어나기 전에 초음파로, 역시 생식기의 생김새를 보고) 성별을 판정한다. 그리고 그 판정과 실제가 다른 경우라도 그냥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으니 꼭 여기에 천착할 필요는 없지만 건강관리를 위해선 자기 성별을 정확히 아는 게 좋다고 한다. 특히 섹슈얼리티에선 육체의 건강과 생식활동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간성이든 아니든 누구에게나 중요하다. 특히 타인에게 연애감정을 느끼고 (남과 하든 혼자 하든) 성교를 하고 애를 만들고 가질 생각이라면 육체(생식)의 상태와 건강은 무지막지하게 중요하므로 최대한 자기 몸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좋다.

 

개인적인 경험을 하나 더 이야기하자면, 내 몸의 상태에 대해서 아는 데는 많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특히 의료인. 어디가 아프면 어떻게 아픈지 왜 아픈지를 알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나의 경험도 필요하지만 좋은 의료인의 도움도 필요하다. 그리고 좋은 의료인(나에게 맞는 의료인)은 찾아야 한다. 내과(가정의학과)는 거의 모든 질환을 기초적으로 다루므로 여기만 잘 찾아놔도 좋다. 잘 모를 땐 그 의사에게 물어보고 분과가 다른 병원으로 찾아가면 된다. 그리고 딱히 드러나는 병증이 없어도 내 몸의 생김새가 이상하다고 느끼면 의사에게 물어봐도 된다. 사람마다 잘 맞는 의사의 성향이나 성별은 다르겠지만 편하게 이것저것 물어볼 수 있고 바보 같은 질문에도 타박하지 않고 가볍게 대답해주는 의사는 누구에게나 좋다.

 

-자극.

몸이 느끼는 감각과 그 감각에 대한 자각과 경험을 뜻한다고 한다. 피부로 느끼는 감각뿐 아니라 시각 촉각 후각 청각 등 모든 걸 포괄하며 딱히 성적인 의미로만 작동하진 않는다. 하지만 내 몸이 특별히 어떤 감각이나 자극에 민감하다면 그걸 성적으로 더 활용할 수는 있다. 이것도 잘 활용하려면 자기 몸과 자기가 느끼는 자극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

인간이 물질이고 물질세계에 살고 있으니 타인과 하는 모든 관계도 결국 몸으로 한다. 밥 먹고 영화나 공연을 보고 듣는 것 모두 몸이 외부 자극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이런 자극 모두 타인과 함께 할 수 있다.

 

-성적 태도와 실행.

아기다리고기다리-던 온전히 성교에 대한 요소. 혼자 하는 성교(자위)와 타인과 하는 성교는 물론, 성적 판타지를 비롯해서 (성행위할 때 좋아하는 언행이란 의미에서) 성적 취향, 실제로 성행위를 하는 방식을 모두 포함한다. 사람에 따라 판타지가 꼭 현실이 될 필요는 없고 오히려 그걸 원치 않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성행위에 대해서도 음경을 질에 넣는 것만이 섹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많고) 전희와 후희 모두를 포함하는 사람이 있다. 성교는 거의 모든 매체에서 거의 같은 방식으로 표현되고 소비된다. 앞으로 타인과 성교를 할 생각이라면 (혹은 하고 있다면) 내가 정말 그걸 원하고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그것만 보고 배워서 그렇게 생각하고 실행하는 건지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관계(친밀함).

대부분의 사람은 인간과 잘 지내고 싶어 하고 거의 평생 애정을 갈구한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부터 부모에게 관심과 사랑을 아주 (징그럽고) 격렬하게 요구한다. 어릴수록 다양한 사람에게서 받는 관심과 애정, 접촉(성적이지 않은 스킨십)을 당연하게 여긴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세상 사람이 (어쩔 땐 부모도) 나에게 별 관심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되는데 이런 걸 삶(인생)이라고 한다. 타인과의 친밀함을 바라는 정도나 원하는 친밀함의 종류, 표현방식도 사람마다 다르다. 물론 인간 말고 다른 종(동물이나 식물)에 친밀함을 느낄 수도 있다.

 

내 생각인데, 절대 집에서 동물을 키우면 안 된다고 했던 아버지(중장년층 아저씨)가 정작 동물을 들여왔을 때 제일 많이 빠지는 이유가 이 친밀함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남성으로 오래 살다 보면 인간적 접촉이나 친밀함을 느끼기가 쉽지 않다. 동성과의 접촉은 거의 없거나 있어도 거칠고 삐뚤어진 경우가 많고 이성과의 접촉은 무조건 섹스로 직결되기 때문에 순수한 애정이나 온기를 느끼기가 힘들어진다. 반면 여성은 나이가 들어도 남성에 비해 친구 혹은 자식과 친밀한 접촉을 많이 한다. 그러니 아버지가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던 친밀함을 느꼈을 때의 기쁨과 충족감은 아마 밖에서 보는 것과는 깊이가 다를 것이다. 

 

-권력과 주체성.

섹슈얼리티 구성요소의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으며 다른 모든 요소에 영향을 주는 사회, 문화적 요소이다. 내가 가진 권력과 나의 주체성은 한없이 개인적이지만 결국 이게 사회에서 주어지고 발현되기 때문에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와 문화를 외면할 수는 없다. 오히려 개인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게 사회와 문화이다.

같은 성정체성에 성지향성, 비슷한 육체적 조건, 비슷한 취향을 갖고 있는 사람 둘이 만나더라도 각자가 가진 문화 사회적 배경, 사회적 지위에 따라 그리고 주체성에 따라 관계가 전혀 평등하지 않을 수 있다. 동성애자는 이성애자보다 상대적으로 평등한 관계를 맺을 거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실제론 전혀 그렇지 않다. 권력의 성질은 그렇게 쉽고 말랑말랑하고 딱딱 나뉘지 않는다. 되게 당연하게 보이면서도 복잡하게 작동하는 게 권력이다.

누구에게나 어느 정도의 권력은 있다. 그걸 내 의지로 활용할지 남에게 의탁할지는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문제이다. 이게 쉽다는 건 아니다. 경우에 따라 내게 주어진 당연한 권리와 권력을 위해 싸워야 할 수도 있다. 싸우는 방식을 선택하는 건도 개인의 자유이고 선택이다. 싸우기 싫다면 안 싸우면 되고 소극적인 싸움이 더 잘 맞는다면 당신을 대신해서 대신 싸워줄 사람이나 단체를 지지하면 된다. 나의 권력을 남에게 의탁하더라도 쉽게 넘겨주지 않는 게 좋다. 뭘 하든 선택은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