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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없이 산다

별일 없이 산다 76

퍼슨 오브 인터레스트 시즌 4까지 다 봤음. 심지어 시즌 2 후반부터 시즌 4 중반까지는 두번씩 본 것도 있다.

시즌 1, 2 중반까지는 그냥 평범한 수사물이다. 배경설정이 약간 특이하달 수도 있는데 911 트라우마를 깔고 있는 점이 그렇다. 개인적으로 집단 트라우마에 관심이 많다. 물론 빅브라더에 대한 것도. 이 드라마에서는 빅브라더가 인간이 아니라 AI인데, 왜인지 모르겠지만 AI이어야만 빅브라더 노릇을 할 수 있다는 설정이 있는 듯? (엄청난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능력과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기껏 미국에 대한 테러나 범죄 감시나 하게 만들다니=_=? 모든 카메라면 우주도 볼 수 있을 거고, 보이져가 보낸 신호도 다 받을 텐데. 이런 정도의 인공지능이 있다면 공부나 시켜라. Deep Thought를 만드는 거지. 캬캬캬.) AI에 대한 의문에도 불구하고 AI가 드러날 수록 이 드라마가 점점 더 재밌어지는데, 왜냐면 내가 본 AI 캐릭터 중에 이 드라마에 나온 '기계'가 두번째로 매력적이기 때문이야!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점, 직접 말하거나 표정을 보여주는 일이 없기 때문에 캐릭터 구축에 더 시간이 걸렸고, 그만큼 잘 만들어졌다. 보통 나쁜 AI 캐릭터는 배우가 직접 연기하는 AI였다는 걸 생각하면, AI 설정이라는 것 자체가 (나한테) 그다지 잘 안 먹히는 것 같기도 하고.

 

여튼 2시즌 후반으로 가면서 점점 기계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러면서 전세계적인 감시시스템인 기계에 맞게 자연히 스케일이 커진다. 인간사회를 어떻게 관리할지 방법론이 다른 양 진영(AI)의 싸움이라고 해야하나. 액숑 수사물 정체성도 지키지만, 시즌이 갈 수록 SF 누와르같다. 세계관이 우울하기 짝이 없고, 정치를 잘 이용한다. 폴리틱의 정치가 아니라 역학관계로서의 정치말일세. 개개의 캐릭터는 잘 만들어졌다고 보기 힘들지만 (캐릭터의 이야기도 마찬가지) 캐릭터들의 역학관계는 굉장히 흥미로움. 덧붙이자면 역학관계 자체는 참 좋은데 그 역학관계를 만들어 내는 과정 자체는 그다지 설득력이 없어서 그냥 설정이라고 생각하고 봐야 한다. (라이오넬이 리스 꼬붕이 되는 거, 리스가 카터를 정의의 상징격으로 대하는 이유라든가, 리스와 핀치의 브로맨스 형성, 루트와 핀치, 루트와 기계의 관계, 리스의 연애 등등 결정적으로 기계와 사마리탄까지 가끔 뜬끔포가 빵빵 터짐.)

 

모든 인물이 나름의 희망을 갖고 있고 완벽한 사회를 꿈꾸며,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데도 불구, 기저에 깔려있는 세계관은 무지하게 우울하다. 그들이 꿈꾸는 완벽한 사회가 망측함 위에 세워져 있고, 그걸 그축하고 수행하는 정치인과 공무원은 부패하거나 자가당착에 빠져있거나 정신승리의 끝을 보여주며 (더 무서운 건 이들이 나름 애국자임. 원래 이런 인간들이 제일 무섭지만...), 기껏 도와주는 사람의 대다수는 상대적으로 힘없는 찐따에 또라이일 뿐이고, 그들을 도와주는 것도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음을 기저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구해준답시고 설치고 다니는 인간들이 만날 총들고 설치고 폭력을 일삼는다는 것도... 근데 이건 뭐 나름 액숑물이니까. 여튼 설정상으로는 완벽에 가까운 현실적인 우울함을 보여준다. 난 이 우울하기 짝이 없는 세계관이 마음에 든다. 그걸 표현하는 방법도 마음에 들어. 그리고 이런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것은 연출이 아니라 음악이다. 연출은 하나도 안 우울하고 특출날 것 없이 평범한데, 배경 음악하나는 기똥차게 깔아놨다. 시즌 3  파이널과 시즌 4 파이널은 나의 괜찮은 엔딩 리스트의 상위권에 들어갈 정도인데, 순전히 대본과 음악 때문인 것 같다. 뭐, 이런 경우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이유가 뭐든 좋으니까 됐다.

 

물론 좋은 게 좋은 거다가 잘 안 먹히는 것도 있다. 사마리탄과 사마리탄을 관리하는 데시마라는 회사. 엄청난 자금력과 정보력을 갖고는 있지만 AI를 만들지는 못하는 데시마라든가, 졸라 드러나게 활동하는 사마리탄을 (사마리탄 요원이 엄한 사람 걸리적거린다는 이유로 죽이고 다니는 것부터 시작해서 시골마을에 분탕질 쳐놓는 것, 어쨌든 조직이니 주거지가 있어야 하는데 그 큰 덩어리를 숨기는 것, 이 모든 것에 의문을 품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다 죽여버리는 데도) 인간들은 모른다는 설정ㅋㅋㅋ 아니, 그리고 그렇게 똑똑하면 굳이 부정선거하지 말고 그냥 원하는 정치인의 선거캠페인을 대신 해주면 되는 거 아녀? 번거롭게 굳이 죽여가면서 할 일 있냐고. 얘네들이 뭔가 되게 강해서 주인공들이 번번히 지고 수세에 몰리는데, 설득력이 떨어지는 게 이런 설정의 과잉때문이다. 많은 드라마가 과잉설정을 갖고 있긴 하지.

 

여튼 이래저래 내가 왜 이 드라마를 좋아하지 싶기도 하지만, 취향의 여자 캐릭터가 많이 나오기도 하고 어떤 설정은 정말 마음에 든다. 게다가 내가 이런 걸 좋아할 거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기계가 전투에 직접 개입할 때 진짜 재밌다. 사실 액션도 좋아하는 스타일이긴 한데 되게 못하거든 ㅋㅋㅋ 그래서 그건 아예 염두해두지도 않음. 근데 기계가 can/you/hear/me 하는 순간 상황이 뻔해질 걸 알면서도 재밌다. 왠지 모를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 게 암행어사 출두요 같은 느낌. 아마 마지막 순간에 나서서 그렇겠지만, 원래 이런 조커카드 별로 안 좋아하는데 별꼴이다. 하긴 나는 기계가 손힐을 만든 순간에 반할 수 밖에 없었음. 게다가 자기 자신을 세상에 깔아놓다니. 큰 공간에 하드드라이브를 멍청하게 쌓아놓는 것보다 훨 스마트하잖아. 딱 내 취향이심.

 

 

-첫 번째로 매력있는 AI는 역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가이드의 '마빈'. 마빈이 공무원들을 어떻게 이겨먹는지 보라!

-불신에서 신의로 관계가 바뀌는 걸 한 에피소드 안에 보여준 사례가 있음. 엑스파일 시즌1 에피소드 7 죽지않는 유충 편. 잘 만들어지기도 더럽게 잘 만들어진 에피소드.

-눈꼽만치도 안 우울할 것 같은데 겁나 우울한 인간관을 지닌 드라마의 대표작는 닥터후.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우울함인데 이 드라마가 영국에서 제일 인기있는 드라마라니 영국인도 참 대단함.

-나의 괜찮은 엔딩 리스트에서 드라마 1위 : 라이프 온 마르스. 여긴 연출이 멋짐. 음악도 멋짐. 진짜 멋지다!

-넘치는 설정이라면 트와일라잇이 둘째가라면 서럽다. 숨을 안 쉬어도 되고 잠을 안 자도 되는 불멸의 존재가 기껏한다는 짓이 고삐리 생활 반복이라니 ㅋㅋㅋ 이건 설정의 과잉 정도가 아니라 그냥 웃김.

-최악의 조커카드라면, 수사물에서 이 모든 것은 범인이 사이코패스이기 때문이다!!! 하고 끝나는 거. 쉬운 길이라 이거지. 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