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3일 :
오전 8시 반에 취리히 도착. 날씨가 구질구질하심. 호스트 집에 도착 남자친구가 반겨주시는데 잘못된 정보로 인해 혼란에 빠졌다가 저녁 때가 되서야 그냥 평범한 게이커플이라는 것을 알았다. 요상하게도 남자친구쪽의 전 마누라가 한국에서 입양된 사람, 아이가 둘이 있는데 인종적으로 한국 혼혈인거쥐. 물론 문화적으로는 그냥 스위스 사람. 아버지의 남자친구와 자주 만나고 노는 모습이라니 여긴 천국인가=_=
어딜가나 대도시 근교에 예술가 도시가 있는데 여기는 바덴이 그렇댐. 호스트 남친이 여기 살아서 덩달아 놀러왔다. 옛날에 예술가들이 와서 온천하고 놀았던 때부터 시작된 문화가 현재는 스위스에서 제일 큰 페스티벌이 열리는 도시가 바덴이라고 한다. 구시가지 한번 돌고 남의 남친네 집에 들어와서 스위스 감자요리(버터에 잘게 채선 감자를 볶은 것) 먹고 자고 잘 놀았음.
6월 4일 :
호스트와 함께 바덴에서 취리히로 와서 중심지 한바퀴 돌고 들어와서 빈둥대다가 저녁은 간장 닭볶음탕. 의외로 잘 팔리는데 나는 좀 짰다. 간장을 너무 많이 넣은 모양이다. 취리히의 인상은 깨끗하고 비싸다. 아침에 걸어다니는데 청소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청소부가 쓰레기통 닦는 거 보고 빵터졌네. 진짜로 쓰레기통을 닦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인 것 같았다. 스위스는 쓰레기통까지 깨끗한 나라임=_= 호스트는 이런 종류의 완벽주의가 때때로 답답하다고. 하긴 우리 호스트는 첫눈에 인도에 반한 사나이. 남친분은 평범하셔서 인도에서 제일 좋은 곳은? 공항. 인도에 있을 땐 괴로워~하다가 비행기 타는 순간 다시 인도로 돌아가고 싶어지는 정말 평범한 사나이. <-이런 말 많이 들었다.
엄마가 밤에 와서 데리러 갔는데 한시간 연착. 공항에서 빈둥대며 소화시키다가 엄마를 만났는데, 어우 짐이~ 일단 과자부터 우적우적.
6월 5일 :
날씨가 좋아서 리기산에 갈까 했지만 처음부터 너무 빡쎄면 안될 것 같아서 취리히 외틀리산에 갔다. 날씨도 좋고 엄마와 쓸데없는 수다를 떨며 대략 4시간 반정도로 걸어주심. 태양계 공원이 있다고 했는데 태양 이후로 본 게 없다. 이런 것도 신경쓰면서 봐야 하는 건가!!
아침부터 부산을 떨며 김밥을 싸고 도시락으로 싸가서 먹고 한국에서 싸온 과자 먹고, 홍삼액도 먹고. 온지 일년만에 뭔가 제대로 먹는 것 같다는 느낌이!! 그것도 산이라고 그러는 건지 간만에 잘 먹어서 그런지 괜히 졸립다-가 아니라 어제 잠을 못 잤구나. 거의 일년만에 다른 사람 옆에서 잔 것 같다. 그 전에는 한방에서 자도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거덩.
6월 6일 :
취리히 호수를 신나게 걸어다녔다. 대략 6시간 정도 걸어 다닌 듯. 환경으로만 보면 취리히 살만한 것 같다. 더럽게 비싸서 글치.
저녁 때는 호스트, 호스트 남친, 호스트 남친의 두 아이, 그 중 딸아이의 남친까지 7명이서 잡채랑 빈대떡으로 저녁을 먹었다. 한국에서는 밥도 잘 안하는데 엄마가 꽤나 제대로 음식을 하고 있음. 뭔가 좀 압박을 받는 모냥이다=_= 그런 거 보면 참 나는 대충 간다. 그냥 하는데까지만해주고 '나는 원래 음식 못해. 한국음식이긴 하지만 일단 맛만 본다고 생각해. 나중에 한국 가면 제대로 된 걸 먹을 수 있을거임'하고 만다. 그래도 잘 먹던데 뭐. 손님 대접이든 손님으로 가서 주인 대접을 하는 거든 성의껏만 하면 되지~
말할 것도 없이 엄마랑은 말이 안 통한다. 울 엄마의 대화 스킬은, 완전히 관계가 틀어진 전 룸메랑 똑같다. 하긴 나도 유야무야 넘어가는 스타일이 아니라는 것도 문제다. 제일 큰 문제는 저 두 사람이 나를 싫어하는데(나라는 인간 자체가 싫은 거에 가깝다. 내가 사는 방식,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생각하는 거 자체를 부정하니까.) 본인들은 어떤 식으로든 나를 좋아한다고 착각을 하고 있다. 나한테 긍정적인 이야기는 그들에게 부정적이거나 말이 안되는 이야기고, 그들에게 긍정적이고 재밌는 이야기는 나에게 어이없고 재수없는 이야기가 많다. 무엇보다 내 입장에서 말하자면 사실과 현상을 구분하는 건 바라지도 않지만 다른 것과 틀린 것도 구분을 못하는 사람들이랑 도대체 어떻게 대화를 해야할지... 내 경우엔 이런 상황이 닥치면 붙어서 싸우지 말고 그냥 후딱 관계정리를 하는게 제일 좋다고 생각하는데 말입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랑 살겠다고 했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랑 한달이나 여행을 하자고 한 걸까 궁금. 물론 같이 살잔다고 살아 보고, 여행하잔다고 완벽하게 계획짜서 같이 여행하고 있는 나도 웃긴다. 그래도 뭔가 패키지로 열흘에 유럽 5개국 도는 여행을 하고픈 우리 어무니. 내 말은 그런 건 좀 다른 사람이랑 하면 안 되냐고.
이를테면 백인 좋아하는 동양 여자랑 잠 좀 자보고 싶었던 이성애자 남자 탄뎀 파트너. 사실 이 색히의 의도는 첫눈에 알아챘다. (그리고 괜히 한번 시험삼아 자는 거라도 너는 아니다, 인마. 내가 주제에 안 맞게 눈이 천장에 가서 달려서ㅠ) 문제는 나도 '99%는 그게 맞지만 혹시 1%의 가능성이 있는 건 아닐까'하며 종종 그 있지도 않은 1%에 기대를 건다는 것이다. 애인이라기 보다는 어떤 인간 '관계'에 대한 희망사항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 상대가 누구든 제대로 된 '관계'만 맺을 수 있다면 무성애든 친구 관계든 부모자식 관계든 뭐고 한번 노력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는 거지. 나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라는 부끄러운 욕망이 있어요. 물론 잘 안 되지만.
이런 상황(자기 엄마랑 여행다니는 건데도 3일 만에 스트레스로 등짝이 다 굳어버리고 밤에 잠을 못자는 상황)이 오면 나는 인간이 덜 된 게 아니라 그냥 인간이 아닌가벼. 인지상정 어디갔냐고. 씨바.
6월 7일 :
늦게 씻고, 인형왕후의 남자 보고, 드라마 이것저것 챙겨보고 새벽 3시에 잤는데 아침 5시 기상.
취리히에서 베른으로 가는 길에 리기산에 들러서 완죤 쉬운 등산로를 뻘뻘대며 올라갔다가 내려오고 너무 피곤해서 루체른 호숫가에서 디비져 잤다. 체력의 한계로구나. 먹기도 디지게 많이 먹었는데 나는 많이 먹으면 쉬어야지 움직이면 몸이 무거워지는 게 느껴져서 아무것도 못하것다. 쌈빡하게 설사까지 해주심.
울 엄마는 보통 한국 사람이라 물을 마셔도 같이 나눠마시고 싶어한다. 먹는 건 말할 것도 없고 화장실도 같이 가야 하는 것이다. 사람 하나 데꼬 여행을 다니는 것도 피곤한 일인데 다른 사람 물 마시고 싶은 시간, 먹는 시간에 맞춰서 먹고 마시고 싸는 건... 왜 나와 당신이 서로 다른 인격체이며 다른 몸뚱이를 가진 다른 존재라는 걸 인지하지 못하는 걸까. 그래서 남들 다 자는데 나 혼자 못 자고 또 드라마보고 이런 신소리나 짓거리고 있는 거져. 근데 아직 여행이 한달이나 남았다. 내 등짝... 남아날까.
베른은 마음에 든다. 관광객보다는 현지인이 더 많은 동네같고, 마침 머무르는 집이 올드타운 안에 있다. 한바퀴 실실대며 돌아다니기 딱 좋겠다. 지금 얻어 자고 있는 집은 무려 16세기에 지어진 집. 들어는 봤냐 16세기에 지어진 집. 인테리어는 모던함. 저녁으로 치즈 녹여서 감자와 함께 먹는 스위스 전통 요리를 대접 받았다. 점심에 이어 과식 했네.
6월 8일 :
바젤의 올드타운과 올드타운을 둘러싸고 있는 강(이름 까먹음)을 마구 걸어당김. 비도 오는데 참 잘도 걸어다니네. 취리히의 투어리스트 인포메니숑 센터가 참 좋다고 생각을 했는데, 바젤은 그보다 못하다. 역시 취리히가 특별히 더 좋았던 거였다.
저녁은 닭볶음탕, 무채나물, 오이무침, 민들레무침 + 밥. 제대로 먹어주셨음=또 과식했다. 우리가 저녁을 만드니 호스트 부부가 후식도 준비. 이 두 사람은 9월부터 일년반 정도 세계여행을 갈 계획이란다. 취리히 커플도 그렇고, 베른 커플도 그렇고 참 사이가 좋다. 하긴 사이 안 좋은 커플이 누구를 집에 초대할 것 같지도 않긴 하다. 그래도 이렇게 멀쩡한(!) 커플 보면 마음이 땃땃해져요. 멀쩡한 커플보다 이상한 커플이 더 많은 세상인지라.
아이고 피곤해.
6월 9일 :
융프라우 등산. 물론 융프라우까지 올라간 건 아니고 그 밑에 부분을 다녔다. 대략 7시간의 빡씬 등산을 한 끝에 엄마나 나나 맛이 가버림. 더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하고 싶지만 사실 산이 어려운 게 아니라 (길도 잘 만들어놓고 안내도 잘 되어 있어서 길 잃어버릴 일도 없다. 어렵다고 해봐야 한국처럼 산이 깊은 게 아니라 돌아다니기 만만하심.) 그냥 체력이 저질이라 그런 것.
나는 등산하면서 물만 마시면서 다녀야 몸이 좀 가벼워지고 등산할 맛이 나는데 엄마는 당연히 먹어야 하는 타입. 네 그렇죠 뭐.
6월 10일 :
어제 고생했으니 늦게 일어나서 호스트가 차려준 브런치를 신나게 먹고, 같이 두시간 정도 산책하고 떠들다가 호스트네 집에 한국음식 남기고 가봐야 먹지도 않고 버릴 것 같아서 남은 반찬에 비빔밥을 하고 우리는 배터지게 먹고 호스트는 맛만 보고 누릉지 만드는 법까지 알려줬다. 밥이 불위에 있는데 타지 않는 걸 되게 신기해 한다. 그리고 프리부룩으로 이동. 오자마자 또 저녁. 프랑스어권으로 오니 밥상이 달라진다. 아무래도 한국인인지라 이쪽 음식이 더 적성에 맞아. 냐하하. 프리부륵 호스트는 연배가 엄마와 비슷하고 인형을 만들어 연극을 하는 예술가다. 엄마가 무지하게 좋아함. 예술가를 좋아하는지 미처 몰랐다=_=;;
나도 참 말하는 뽄새가 글러먹었지만(한마디로 싸가지가 없지만) 그래도 적당히 말같은 말을 하고 산다고 생각한다. 첫번째 호스트 남친의 아이들을 보고 '혼혈은 예쁘다더라'거나 음식문화가 다른 것 뿐인데 '쟤들은 깔끔하지만 음식같지 않은 음식을 먹고, 여기는 요리를 한다'라고 하면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참 난감해지는 것이다. 하긴 더 큰 문제는 설명을 해줘도 못 알아드는 거지만. 설명해서 알아들을 정도면 울화가 터지지도 않지. 지금 나는 울화도 터지고 배도 터지고. 죽갔구먼.
6월 11일 :
연령대가 비슷하고 집안이 지저분하고 음식이 좀 더 버라이어티 해지니 어머니가 이 호스트의 집을 무지하게 편하게 생각한다. 대다수의 한국 사람에게 '문이 열려있음 = 들어가도 됨'과 같아서 프라이빗, 프라이버시에 대한 개념이 없어서, 안 그래도 '남을 들여놔줬음 + 여기 편안함'의 여파가 크다. 물론 호스트는 크게 신경쓰지는 않고 엄마도 마음에 드는지 더 편하게 잘 대해주고 뭐 하나라도 더 해주고 싶어한다. 보기에 재밌음.
왜인지 혓바늘까지 돋아서 날씨도 좋은데 하루종일 비비대고 내내 먹으며 놀았다. 슈퍼에 갔더니 (같은 슈퍼였는데) 놀랍게도 취리히와 베른보다 야채가 많음 ㄷㄷㄷ 뭐냐 이거. 문화권에 따라 들어오는 야채 숫자가 달라지는 거야? 아니면 거기는 도시였고 여긴 시골이라 그런가!! 어쨌든 주렁주렁 사와서 먹어댔다.
먹어대며 신사의 품격을 6편까지 다 봤다. 역시 김하늘은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워. 잇힝. 김하늘 때문에 김은숙 드라마를 또 보게 되는구나. 김은숙 드라마는 막장으로 넘어가는 그 경계에서 줄타기를 잘한다. 과한 것 같으면서도 자본주의 한국사회에 설득이 되는 상황이나 대사가 많다. 실제로 네명의 불혹에겐 나이 먹은 만큼의 어른스러움은 없고 나이가 든 만큼의 돈만 있다. 적당히 돈 많은 중년들이 돈 쓰면서 살고 연애하는 이야기잖아. 품격은 돈에서 나옵니다. 남자가 여자가 어쩌고 하는 건 아예 설득력이 없고, 나에겐 돈지랄은 돈지랄, 애취급은 애취급. 유치한 거는 유치한 거고, 애취급 당하는 건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이상하게 한국 로맨틱 코메디에서는 유치한 것과 애취급이 동급이란 말이지. 너넨 애랑 섹스하냐! 좀 성인이랑 해라, 성인이랑. 오빠나 아빠형 남자를 좋아하는 것도 이해가 좀... 아빠나 오빠랑 하지 마. 그르지마...
나도 선물 좋아하고 돈도 좋아하는데, 10만원짜리 구두 사주고 130만원 기부해보는 머리는 없는 걸까. 아님 140만원 돈지랄했으니 그만큼 다른데 쓴다거나. 스튜디오60라는 드라마에서 남자가 여자때문에 순결 어쩌고 하는 단체에 기부(상황상 돈지랄)을 하는데 자기의 양심에 찔렸던 남자는 돈세탁을 위해 순결 단체 기부액에 일달러를 더 얹어서 난장을 권장하는 단체에 기부를 한다. 물론 여자랑은 대판 싸우셨음. ㅋㅋㅋㅋ 근데 난 이 에피소드가 더 좋아 ㅋㅋㅋㅋ
6월 12일 :
늦게까지 테레비를 봤으니 9시쯤 느긋하게 기상. 날씨가 안 좋다. 으헝헝. 근데 되게 덥기도 하고 비가 많이 오기도 하는게 스위스 6월 날씨램. 거의 반반. 7, 8월은 비오는 날보다 햇볕나는 날이 더 많다고 한다. 오늘은 엄마의 바람대로 치즈와 초콜릿 공장에 갔다왔다. 엄마의 사랑 호스트가 태워다 주고 태워 왔는데, 우리만 공장 구경하고 호스트는 밖에서 기다림=_= 무슨 이런 경우가? 어쨌든 이런 코스는 바쁘신 여행자의 코스인데 (시간은 없고 뭔가는 봐야겠고 뭔가 얻어올 수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공장견학) 역시 재미없더만. 엄마의 리퀘스트로 다녀왔지만 본인도 그닥 즐거워하지 않으심. 오히려 뭐 이딴 게 입장료가 이렇게 비싸냐고 하심. ㅋㅋㅋ 그나저나 풍경 좋은 그뤼에르지역을 차로 휙 돌아보고 대부분의 시간은 공장만 구경했네. 하긴 비가 와서 뭐하기도 참 그릏다. 사실 난 나오기도 싫었음.
저녁은 호스트 가족과 함께 닭볶음탕. 땀을 뻘뻘 흘리며 훌쩍 거리며 먹는다;;
6월 13일 :
로잔으로 옮기는데 빠른 길 내버려두고, 프리부르 북쪽에 있는 큰 호수를 삥~돌아가는 노선을 택했다. 원래 날씨가 좋으면 여길 놀러가려고 했었고 마침 기타가 그렇게도 가길레 그렇게 샀는데... 날씨가 안 좋아서 쥐뿔 뵈는 게 없으심. 로잔 도착. 젊은 비혼 커플+아이 하나 호스트를 만났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나이가 많든 적든 애가 있으면 애 위주로 생활이 개편된다. 밥 먹는 시간도 그렇고 생활도 그렇고. 둘이서 잘 나눠서 아이 키우는데 참 좋아보였음. 무엇보다 애가 겁내 잘 먹고 잘 웃고 잘 싼다. 내가 본 애 중에서 성격 제일 좋은 애였음. 이제 십개월 된 애였는데 말도 못하고 서지도 못하는게 무시무시하게 활달하다. 손주를 보고 싶은 우리 엄마는 애를 나서서 봤음. 당신이 젊었을 때 일하면서 애 키우며 고생했던 게 생각나서인지 호스트 언니를 도와주고 싶어하기도 했다. 저녁은 애 아빠가 뢰스티(첫날 바덴에서 먹은 감자요리)를 해줬다. 느리지만 성실하게 하는 타입. 평생 공부 했다더니 뭐랄까 정말 뭐든 공부하듯 성실히 하는 타입인 것 같았다.
호스트네 집에서 보는 로잔 호수의 풍경. 짱 좋으심. 아니 그나저나 호수 저쪽에 에비앙이... 난 이게 후랑스 지명이름인지 이제 알았수.
6월 14일 :
김밥 싸서 애랑 애 엄마랑 소풍. 로잔 호숫길을 줄창 걸어다녔다-라고는 해도 3시간 정도. 날씨도 간만에 좋고, 풍경도 좋고, 실없는 소리도 하고 할 말 없을 때는 애 구경하면 되고. 뭔가... 마음이 편한 소풍이로다.
소풍하고 애 엄마랑 헤어지고 시옹으로 고고. 시옹 호스트는 여직까지 만난 호스트 중 가장 '한국적인 가정'의 모양새를 하고 있다. 아빠, 엄마, 딸 둘, 고양이 한마리. 이탈리안 아빠, 스위스인 엄마라는 게 좀 다른가. 점점 이탈리아 지방에 가까워지고 있기도 하고 음식이 이탈리안으로 바뀌고 있다. BBQ를 해줬는데 (라고 해봐야 슈퍼에서 사온 앵념고기를 구운 것) 그 바베큐용 난로(?)가 전형적인 이탈리아 스타일이라고 한다. 오옹, 그런 것도 있었구나...
6월 15일 :
마테호른 구경하러 체르마트에 갔다. 가서 마테호른 맞은 편이 있는 산을 올랐음. 스위스는 매번 경치 좋다고 말하기도 귀찮아지는 것 같다. 어딜 가나 깨끗하고 정리가 잘 되어있다. 심지어 정보도 정리가 잘 되어 있어서 여행하기 정말 편하다. 지도하고 철도청 홈페이지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음=_=
가는 길에 기차에서 엄마랑 싸웠는데 싸운 이유도 졸라 웃기다. 뭔 이야기를 하다가 별 생각없이 조선시대 사람들의 섭취 칼로리가 현대인과 비슷하다라는 것이었는데, 거기에 반박- 본인의 상식과 어긋난다 -> 나는 엄마의 상식이나 엄마가 어떻게 알고 있던 것과 상관없이 연구결과가 그렇다고 한다 -> 내가 엄마한테 우기고 있다. 뭐 이런 상황. 나는 엄마랑(그리고 전 룸메랑도) 이런 일이 종종 있다. 제일 골때렸던 일은, 중딩때인가 테레비를 보는데 토크쇼에서 이정재가 나와서 제일 좋아하는 와인이 매독이라고 했고, 나는 매독이 무슨 뜻인지 몰랐고, 별 생각없이 엄마한테 이정재가 매독이라는 와인을 좋아한대 -> 매독이란 술이 있을리가 없다. 그건 병이름이다. -> 그래? 그래서 사람들의 반응이 그랬나? 근데 하여간 이정재가 그렇게 말했어 -> 그랬을리가 없다. 네가 잘 못 들었다. 뭐 이런 상황으로 그 때 욕을 종류별로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그 자리에 있던 내 동생, 친척까지 아직도 그 상황을 기억할 정도다. 뭐 그 사람들에게는 해프닝이겠지만 설사 내가 잘 못 들었다고 해도 귓구녕 막힌 것 정도로 미친년 소리까지 들은 나는 와인 매독을 볼때마다 참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이 두 사람이 나한테 원하는 걸 확실하게 깨달았는데, 그냥 이순간에 내가 그 사람들 의견에 반하지 않고 '그래 네 생각이 맞을 수도 있지'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이상한 건 나는 의견에 대해 말하지 않고 사실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저들은 내가 자기 의견을 무시하고 있다고 느낀다는 것이고, 연장자인 우리 엄마는 딸년이 본인을 무시한다고 '느꼈던' 것이고 나보다 한살 아래였던 뱃속에 남자가 들어있던 마초성향 전 룸메는 뭐로보내 내가 자기보다 잘난게 없는게 내가 자꾸 자길 무시한다고 '느꼈던' 것이다. 뭐 확실히 말하면 내가 그들을 무시하는 건 맞다. 다만 무시의 포인트가 다른데, 사실을 잘 못 알거나 우겨서 무시한다기 보다는, 그냥 지 꼴리는대로 나와는 상관없이 그렇게 '느끼는 것' 자체가 참... 나를 앞에두고 다른 사람(정확히는 자기 자신)을 상대하고 있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여튼간에 엄마가 그냥 지금 이순간 나를 이기고 싶어한다는 걸 안 순간... 화가 없어져 버렸다. 원하는 게 뭔지 알았다. 물론 원하는 걸 해줄 생각은 없지만 그동안은 솔직히 전부 내 문제인줄 알고 스트레스 많이 받았는데 두 사람 다에게 내가 스트레스 받을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자기 문제는 자기가 알아서. (뭐 이런 부분이 무시하는 거지=_= )
6월 16일 :
호스트네 가족이랑 동네 뒷산...이라고 하기엔 좀 큰 규모에 좀 좋은 경치를 갖고 있는 산에 가서 여하간 구경 좀 했다. 나는 본격 스트레스에서 벗어나서 뭔가 기분이 가벼워졌음. 스트레스성 여드름도 순식간에 진정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다만 체력이 엥꼬가 나서 대략 맛이 간 상태. 같이 여행을 다니는데 엄마보다 못 한 체력=_= 한참 어린 딸년을 불쌍해하는 우리 모친. 힘들게 홍삼엑기스를 들고 왔는데 나는 이거 없었으면 여행 못 다녔을 것 같다. 체력은 바닥 났는데 홍삼힘으로 벝티고 있으니 몸의 느낌 자체가 좀 묘하다. 피곤하고 졸립고 몸이 바닥에 가라앉는 것은 같은데 어떻게 움직일 수는 있는- 말 해놓고 나니 좀비 같은데?
여튼간에 로잔으로 옮긴 날 저녁부터 날씨 좋음. 특히 시옹은 분지 지형이라 되게 후덥지근하다. 와이너리가 많은 이유를 알겠다. 저녁은 호스트 이웃(아프리카에서 온 가족)을 초대 닭볶음탕+밥+진달래잎무침+오이무침으로 식사. 아프리카 사람들은 잘 먹는데(양념, 야채가 많고 매운 게 아프리카 음식과 비슷한 면이 있다고 한다) 호스트 남편은 거의 울겠음. 맛있다며 땀을 뻘뻘흘리며 먹는데 도대체 진짜 맛있긴 한거야?
6월 17일 :
시옹에서 루가노로 이동. 기차를 타고 이탈리아 도모도솔라에서 한시간, 로카르노에서 한시간씩 내려 돌아다니다가 루가노로 들어갔다. 지역도 멀지 않은데 그리고 비슷한 문화권인데도 이탈리아 도모도솔라와 로카르노, 루가노의 풍경이 다르다. 공원 정리해놓은 거나 사람들 하고 다니는 모습, 역의 모습 등등. 그리고 루가노보다는 로카르노가 관광지에 가깝다. 더 예쁘긴 하걸랑.
이번 호스트는 산 좋아하는 엄마보다 나이 많은 아줌마. 산에도 많이 다니고 하고 싶어하는 것도 좀 색다르다. 예전엔 집에서 만든 치즈와 소세지를 만드는 식당을 했었다고 하고 그 뒤로도 산위에서 식당을 했댐. 경험이 많고 사람을 많이 만나서 그런지 의견이 굉장히 중도적이다. 나이가 많아서 이해심이 넓은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뭔가 미묘한게 있어.
6월 18일 :
호스트가 예전에 했었던 산위의 식당에 갔었다. (왕복 세시간) 식당 옆엔 축사가 있는데 여름이 되면 소를 데려오고, 아침 저녁으로 짠 우유로 그 자리에서 치즈를 만들어 판다고 한다. 뭔가... 퐌타스틱해. 난 이런 걸 좋아한단 말이져.
저녁은 호스트 전 직장동료를 불러서 또 닭볶음탕에 밥 해먹고 취침. 직장동료들이 모이니 하는 이야기가 뻔하다. 일 이야기, 회사 가쉽, 직장 상사 욕. 들었어도 재미없었겠지만 이탈리아 말로 떠드니 뭐가 재미있었겠냐능.
6월 19일 :
루가노에서 포스트버스 타고 장크트모리츠로 가고 거기에서 다시 후어(추어? chur)를 들렀다가 장크트갈렌에 도착.
뭐 되게 유명한 코스래서 타봤는데 하루 온종일 버스, 기차 타고 다니는 일은 더럽게 힘들구랴. 죽을 지경. 그리고 베르니나 열차 코스는 생각보다 별로였다=_=;; 베르니나 열차로 탔으면 더 죽을 뻔 했네. 버스 구간이 더 좋았는데, 문제는 버스 타고 오면서 막판엔 졸았다. 근데 어떻게 아냐면 잔게 아니라 졸은 거고, 우리 엄마는 졸다가 풍경이 너무 좋다가 깨서 사진을 찍을 정도 였음. 어쨌든 힘든 건 힘든 거임.
장크트갈렌에선 바로 뻗고 주무심.
6월 20일 :
체력 완죤 바닥. 뭘 할 마음이 들지를 않는다. 그냥 잠깐 날씨 좋아졌을 때 동네 한바퀴 돌고 집에 들어와서 밥했다. 호스트랑 밥 먹는 게 제일 큰 일과 중에 하나인 것 같다 ㅋㅋ
호스트는 빅뱅이론의 레너드처럼 생겼다. 더 레너드같은 면이 있는데- 집에 핀볼게임 기구가 있고, 벽엔 슈퍼히어로를 유화로 그려놓은 그림(순수미술로 표현한 팬픽)이 걸려있고 본인도 엔지니어다. 꺄올. 집이 기가 막히게 깨끗하고, 요리가 취미이심. 뭔가... 교과서적이야!!
6월 21일 :
장크트 갈렌에서 근처 항구로 가서(이름 까먹음) 보덴호수를 바라보며 빈둥대다가 배타고 린다우로 갔다.
안녕 스위스. 기회되면 또 보자.
스위스 감상 : 독일 와서 느끼는 건데 정말 깨끗하긴 하다. 그렇다고 독일이 더러운 것도 아닌데 스위스는 정리정돈이 기가막히게 잘 되어있다. 잔디도 정리정돈하는 모냥새.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