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별일없이 산다

별일없이 산다 11

여행을 다니다보면 호의를 많이 만나게 된다. 나도 모르게 호의를 주기도 한다. 사실 이런 건 누가 먼저 주고 누가 받기만하고 이런 건 상관없는 것도 같다. 호의란 것도 주고 받는 거라 내가 먼저 주면 받게 되고 내가 먼저 받으면 나중에라도 돌려주게 된다. 그리고 돌고 돌아 다른 사람한테 주기도 하고 다른 사람한테 받기도 하고 그렇지. 요즘 뻑하면 민폐와 개념에 대해 하지만 원래 사람 사는 게 가끔 민폐도 끼치고 개념없이 굴기도 하고 그러는 거잖수. 물론 그런 걸 내가 당하면 별로 기분 좋진 않다. 근데 보통 내가 민폐를 끼치거나 개념없이 굴때는 감지하지 못하니까 대충 참고 넘어가는 게 좋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지.

 

주자나도 그렇고 크리스티나도 - 그 외 베를린에서 나를 호스팅 했던 카우치서퍼도 그렇고, 지금 신나게 신세지고 있는 오렐리아도 그렇고 메탈리카 공연에서 무등 태워 준 아저씨도 그렇고 도대체 황송해서 어째야하나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저 무등아저씨는... 내 메탈리카 공연에 대한 인식 자체를 뒤집어 놓은 셈이다. 다른 사람이 하는 어떤 경험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가 얼마나 힘든지 아냐! 보통 이런 건 예술이 한다고 생각하지. 물론 이 아저씨가 했던 게 쉽다는 건 아니다. 난 3킬로짜리 노트북 가방 들고 다니면 다음날 앓아눕는데 이 아저씨는 30분씩 두 번. 게다가 한번 올라가서 그렇게 오래 앉아있는 애는 나밖에 없더라고;; 내가 남친이랑 갔어도 안 해줬을 걸 아무런 댓가없이 먼저 해주겠다고 하는 그 배포. 됐다고 싫다고 그렇게 말하는데 굳이 데려다주겠다고 따라오더니 데려다줬으니 키스해달라고 징징대던 고딩 교사가 생각나. <-하필이면 이런 색히가 생각나는 것도 인생의 아이러니. 근데 왜 그런 색히가 생각나는지 나는 잘 알지. 

그 색히한테는 결국 귀찮아서 키스해줬지만 저 아저씨한테는 아무것도 못했다. 공연 끝나고 맥주라도 샀어야 했는데(어차피 대화는 못한다. 내가 체코말을 못해서.) 내가 그 뒤에 약속도 있었고 스탠딩이라 꼬라지가 뻔할 것 같아서 아예 지갑을 안 가져갔거덩. 내가 진짜 그날 밤에 얼마나 땅을 치고 후회했는지 모른다. 지금도 돌아다니면서 아저씨가 생각남. 너무 고마운데 고맙다는 표시를 못 냈어. 그냥 말로만 했다는 게 너무 걸린다. 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되는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싫어. 내가 뭔가 해주고 싶다고! 근데 다신 못 만나잖아=_= 억울하다. 좆병신들한테 귀찮다는 이유로 해달라는 대로 해줄 시간과 정력이 있었다면 나한테 호의를 베푼 사람한테 더 잘 해야 한단 말이지. 물론 돈이 돌고 돌듯 호의도 돌고 돈다는 건 알지만 이런 건 억울해! 진짜 억울해.

 

가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다보면 연극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아무래도 생각하는대로 말하지 않고 하고 싶은대로 행동하지 않고 연기하듯이 말하고 행동할 때가 많은데 그게 극대화되면 굉장히 이상한 연극이나 연속극을 보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보통 잘해주는 행동에 반응을 안하는데 이렇게 순수한 호의를 받다보면 왠지 좀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그 호의를 못 돌려줘서가 아니라 그냥 괜히 부끄러워져. 현대사회에선 순수한 호의를 받을 일이 별로 없다 보니까 어떻게 반응해야할지도 잘 모르겠고.

 

무등 아저씨, 첫 카우치서핑 호스트 역활에 들뜬 모습을 보여주던 라덱과 사르카(호스트 못한게 아쉽다고 되려 나한테 밥을 쐈숴 ㄷㄷ), 길 잃어버리지 말라고 정류장부터 집까지 노란 리본을 달아준 루시아. 라덱과 사르카, 루시아, 크리스티나, 주자나는 언젠가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무등 아저씨는 평생 잊지 않겠어요. 앞으로 아저씨는 메탈리카랑 세트야ㅠ

 

 

덧.  

I'm everybody. I'm good I'm bad I'm smart I'm stupid...

대런 크리스가 인터뷰에서 이런 비슷한 말을 했었다. 난 이 말을 듣고 손꾸락이 오그라들었지. 이 색히가...이렇게 멋진 말을 하다니 ㄷㄷ

어쨌든 사람이 잘 맞고 안 맞고는 한 사람이 갖고 있는 여러가지 부분이 다른 사람의 어떤 부분과 만나느냐에 따라 다른 것 같다. 나한테 잘해준 사람이 보통 사람보다 착하거나 마음에 여유가 있거나 돈이 많거나 혹은 나랑 의견이 맞아서 호의가 좋았던 게 아니다. 그 사람들의 좋은 면과 상황이 나의 좋은 면, 상황과 잘 만난거지.

 

덧2.

당연히 고삐리 교사랑은 다시 만나지 않았다. 무성애자가 아니려고 노력했던 시절의 거지같은 기억이라고나 할까. 성정체성은 눈치채는 순간 바로바로 인정하는 게 살기 편합니다, 여러분. 노력해봐야 하나 쓸데없는 불쾌한 경험치만 쌓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