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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없이 산다

연말 정산-신년 계획 등

1. 작년엔 시간 낭비를 했다. 기분상 시간을 통채로 내다 버린 기분이다. 차라리 가만히 누워서 테리비 보고 라디오를 들었으면 이런 기분은 안 들었을 거다. 늘 그렇지만 항상 사람(인간관계)가 문제다. 작년에 내가 제일 많이 한 말은 '벽보고 혼자 떠들면 속은 안 뒤집어 지지'인데, 생각해보면 일기(블로깅질)도 안 쓰고 그 어느 때보다 사적으로 사람을 많이 만나고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결론이 '커뮤니케이숑 안 됨'이라는 거지. 참 새삼스럽다. 나는 보통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훨씬 더 많은 사람들과 일을 하는데 이제와서 이걸 다시 각인하게 된다는 게 참으로 새삼스럽고, 그래서 더 시간 낭비를 한 기분이다.

그래서인지 친구가 '타인은 지옥'이라고 하던데, 나같은 히키코모리한테 딱 들어맞는 말이라고 생각해서 한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친구여. 그 문장 자체가 좀 멋있긴 하지만 사르트르 옵빠가 틀렸다. 지옥같은 타인이 있는 거지. 모든 타인이 지옥같은 건 아니라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니까여. 보통 사람에게는 혼자가 지옥이다.
뭐, 나한테는 어느정도는 맞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혼자 있을 때가 좋아. 나는 말 한마디도 안하고, 아무도 안 만나고 2-3개월씩 있을 수 있거덩. 아무렇지도 않아. 나는 그렇게 보통 사람이라면 미칠 짓을 하는 게 좋은 걸 넘어서 편안함과 안도를 느낀다. (그러니까 어디 가둬놓고 얼마나 잘 버티나 하는 실험은 나한테 했어야지. 어디 엄한 사람들 붙잡아다 이상한 실험을 하고 그러나. 내가 할테니 나한테 돈 주쇼. 그거 알바비도 쎄던데...진짜 있는 알바인지는 모르겠다만 지금 상태라면 일년도 혼자 있을 수 있음 ㅋㅋ)

워낙 많은 사람을 만나는 일을 했었고, 우울증이 심해서 몰랐지만 본래 사람을 꺼리는 타입이 아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오는 사람은 안 막는다. 물론 가는 사람도 안 막는다. 내가 누굴 먼저 내쳐내는 일도 거의 없다. 오고 싶으면 오고 머물고 싶으면 머물고 가고 싶으면 가는 거야. 타인이란 게 내가 오란다고 오고 가란다고 가지 않거덩. 인간이 그렇게 마음대로 되간디? 
그래도 하나는 바꿔야겠다. 누가 만나자면 일단 무조건 만나고 보는 게(뭐 같이 하자면 되게 쉽게 그러자고 한다) 체질이 되어 있는데 이짓을 이제 그만둬야겠다. 신년 계획은 '시간 낭비 고만하자'되겠음. 정말이지 내가 하는 짓이 지긋지긋해졌다.


2. 같이 사는 친구의 친구가 암에 걸렸다. 2년 전부터 통증을 호소했는데 병원에선 '스트레스 때문인가봐영'이러면서 방치, 2년이 지나서야 MRI를 찍어보고, '옴마나 암인데 암이 온 몸에 퍼졌네. 6개월도 못 살겠네여' 이러고 있는 거지. 내가 이 분이랑 통화를 두어번 했는데 (이야기를 하려고가 아니라 전화를 바꿔주려고) 목소리가 6개월도 못 사는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룸메가 암걸린 친구에 대해 말하는 거나, 자기 집안사를 말할 때도, 그리고 내가 (그다지 즐겁지 않은) 내 이야기를 할 때도 마찬가지인데 얘네들은 뭘해도 좀처럼 쉽게 감정이 터져나오지 않는다. 그냥 그랬어-하는 분위기로 말을 한다. 나도 그래서 쉽게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기도 해. 한국 사람들한테 내 이야기하면 '이 불쌍한 년, 이런 슬픈 이야기를 하다니'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좀처럼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몰라서 입을 꾹 다물고 있거나 혹은 무한 (자기들은 진심이나 나에게는 싸구려인) 위로를 해주는데, 웃기는 건 그런 반응을 받다보면 나도 점점 감정적이 된다는 거다. 한마디로 오버하게 된다는 거지. 위로는 당연히 되지 않는다, 이 불쌍한 년이라는 전제를 깔고 오는 위로에는 부끄러움만 남아. 저 사람은 나를 이상하고 불쌍하게 본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무슨 소리를 들어도 남는 건 오바하고 식으면 남는 민망함 뿐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그런 이야기는 그런 종류의 사람에게만 한다. big deal로 안 만드는 게 편하니까 위로 안 받아도 되거든. 내가 잘못하지 않은 거 나도 알고 있거든. 어디서 주워먹은 소리 읇는 걸 듣고 있느니 '야~ 우리 XX도 졸라 싸이코지만 너네 YY도 되게 이상하다'하면서 낄낄대는 게 훨씬 마음 편하고 소통이 되었다는 기분이 들어.
내 룸메랑도 마찬가지. 둘이 밥 먹으면서 테레비 보고 놀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더 심리적으로 편하다. 도대체가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조용하고 진지하게 준비하고 말을 해야하나. 그래봐야 불쌍한 년밖에 더 되나. 그리고 나를 불쌍한 년으로 만들어야 위로의 말이 나오는 그들도 참.


3. 나름 재밌는 사실.
나랑 이야기가 제일 잘 통하는 한국 사람을 꼽으라면 나랑 비슷한 사람이 아니라 나랑 전혀 다른 완젼 다른, 누가봐도 전혀 다른 범생이 스타일의 친구다. 사실 말이 잘 통하려면 같은 언어를 할 필요도 없고, 비슷한 취향이나 경험을 할 필요도 없고, 그냥 귓구녕을 열어놓으면 되는데 거의 모든 사람에겐 귓구녕에 자기 사고방식이라는 필터가 있거덩. 그런 거 보면 듣는 것도 재능인 것 같긴 하다. 생각해보면 얼마나 훌륭한 재능인가.